유통
한 잔의 부르고뉴 와인에 모든 것이 녹아있다 [와인 인문학]
- 포도 재배 최적화된 양질의 토양 부르고뉴
떼루아 계급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예술품
로마의 포도나무, 갈리아에 뿌리내리다
모든 것의 시작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군단이 갈리아(Gaul), 즉 오늘날의 프랑스 땅을 밟았을 때 그들은 단순히 영토를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의 법률과 건축 그리고 포도나무를 가져왔다. 로마인들은 부르고뉴의 완만한 언덕과 석회질 토양이 포도를 재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땅임을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그들은 이곳에 대규모 농장인 ‘빌라’(Villa)를 건설하고 포도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로마의 체계적인 농업 기술과 토지 소유권 개념은 황무지를 질서 있는 포도밭으로 바꿨다.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포도 품종은 이 땅의 풍토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 순간 부르고뉴의 운명은 결정됐다.
로마 제국이 쇠락한 후 그 유산을 이어받은 것은 다름 아닌 중세의 수도원이었다. 베네딕토회와 시토회 수도사들은 부르고뉴 와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실질적인 경작자였다. 그들은 신에게 봉헌할 최상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밭을 경작했다. 수도사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를 돌봤고 수세기에 걸쳐 각 밭의 미세한 토양 차이·경사도·일조량의 변화를 기록하고 분석했다. 동일한 포도 품종이라도 몇 미터 떨어진 밭에서 전혀 다른 맛과 향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떼루아’(Terroir)라고 부르는 개념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가장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밭에 돌담을 쌓아 경계를 표시했다. ‘클로’(Clos)라 불리는 이 돌담은 부르고뉴 포도밭의 신성한 경계가 됐다.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 ‘클로 드 타르’(Clos de Tart) 등 전설적인 포도밭의 이름은 바로 이 수도사들의 헌신적인 노동이 낳은 산물이다.
수도원이 1000년 가까이 지켜온 부르고뉴의 포도밭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불길 속에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했다. 혁명 정부는 막강한 부를 소유했던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경매에 부쳤다. 이 과정에서 거대했던 수도원의 포도밭들은 수많은 개인에게 잘게 쪼개져 팔려나갔다. 나폴레옹 법전은 자녀 균등 상속을 의무화했고, 세대를 거치면서 포도밭의 파편화는 더 가속화됐다. 끌로 드 부조(Clos de Vougeot) 같은 그랑 크뤼(Grand Cru) 포도밭은 오늘날 80여명의 소유주가 나눠 갖는 기이한 구조를 만들었다.
파편화된 소유 구조는 역설적으로 부르고뉴 와인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경제학적 배경이 됐다. 1855년 보르도가 샤토(Château) 단위로 등급을 매긴 것과 달리, 부르고뉴는 중세 수도사들이 구분해 놓은 ‘밭’(Terroir) 자체에 등급을 매기는 방식을 택했다. 최고의 밭은 그랑 크뤼(Grand Cru), 그다음은 프리미에 크뤼(Premier Cru)로 서열화됐다.
이런 계급 시스템은 극도로 제한된 생산량과 맞물려 강력한 희소성을 만들었다. ‘가장 비싼 와인은 가장 적게 생산된 와인’이라는 공식이 탄생한 것이다. 수요는 넘쳐나지만, 공급은 한정돼 있으니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을 수밖에 없었다. 부르고뉴의 와인 가격은 품질뿐만 아니라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토지의 역사와 프랑스 혁명이 남긴 소유 구조 그리고 수도사들이 정립한 떼루아의 계급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예술품인 셈이다.
오늘날 부르고뉴의 최고급 와인들은 더 이상 마시는 음료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전 세계 부호들의 수집품이자 가장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투자 자산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한정된 그랑 크뤼 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매년 열리는 ‘오스피스 드 본’(Hospices de Beaune) 자선 경매는 부르고뉴 와인의 시장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또 전 세계 와인 애호가와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작은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 한 병이 수억 원을 호가하는 현상은 단순히 맛과 향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역사와 토지 그리고 희소성이 빚어낸 경제학적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한 잔의 부르고뉴 와인에는 로마 제국의 야망과 중세 수도사의 신앙 및 프랑스 혁명의 격동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욕망이 모두 녹아있다. 잘게 쪼개진 황금의 언덕 위에서 펼쳐지는 이 장대한 드라마는 우리에게 와인이란 인류의 역사를 담은 유동적인 유산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와인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경제를 이해하며 인간의 삶을 통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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