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낙원'으로 불리며 휴양객과 신혼부부의 발길이 이어지던 남태평양 피지가 치명적 바이러스의 급속한 확산으로 흔들리고 있다.피지 정부는 최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 사례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전 국가적 비상사태를 전격 발령했다. 보건당국은 전염병 양상이 통제 범위를 넘어섰다는 점을 공식 인정하고, 국가 자원을 총동원한 대응 체계로 전환했다고 설명했다.수치로 나타난 실상은 충격적이다. 지난해 신규 집계된 HIV 환자만 2016명으로, 불과 1년 사이에 27% 늘어났다. 2019년과 비교하면 무려 16배나 폭증한 수치다. 현재 피지 성인 인구 60명 중 1명이 바이러스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며,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은 인구 92만 명인 피지의 실제 감염 인구를 9100명 이상으로 가늠하고 있다.낙원으로 불리던 섬나라가 이토록 흔들리게 된 일차적 원인으로는 마약류 밀매와 오남용이 꼽힌다. 피지는 중남미나 아시아에서 제조된 마약이 오세아니아 주요국으로 향하는 수송 길목에 위치해 있다. 코로나19 이후 해외 범죄 조직이 현지 유통책에게 금전 대신 메스암페타민 등 강력한 환각제로 대가를 지급하면서 국내 마약 시장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정맥 주사 형태의 약물 투여가 급증함에 따라 주사 바늘을 공유하는 행위가 일상화됐고, 이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확인된 감염 경로 중 절반 이상은 성적 접촉, 42% 이상은 주사기 공동 사용으로 파악됐다.보건망의 부실도 화를 키웠다. 감염자 중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는 비율은 39%에 불과하며, 항레트로바이러스제 치료를 받는 비율 역시 22%에 그친다. 이는 전 세계 평균 치료율인 78%와 비교했을 때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낮은 콘돔 사용률도 악순환을 부채질했다.피해는 미래 세대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임산부 100명 중 2명꼴로 바이러스에 노출돼 있으며, 지난해 양성 판정을 받고 태어난 아기 59명 중 18명이 생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숨졌다. 최근에는 생후 2개월 된 아기가 바이러스와 결핵에 동시에 감염된 사례까지 확인됐다. 이에 따라 관련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지난해 117명으로 2021년(25명) 대비 4배 이상 폭증했다.사태의 엄중함을 인지한 피지 보건당국은 신원 비공개 방식의 무료·자발적 검사를 대폭 늘리고, 감염 전 예방 약물 요법(PrEP) 도입, 주사 약물 사용자 대상 피해 감소 프로그램, 감염자 무료 치료 등 종합적인 예방 및 치료 접근성 강화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