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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징금 2조 시대…이재명 정부 공정위는 공정한가

산업 일반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철도·석유·철강 산업을 장악한 거대 트러스트가 가격과 생산량을 좌우하고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막았다. 미국이 독점과 담합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1890년 최초의 경쟁법인 셔먼법을 제정한 이유다.한국 공정거래법의 출발도 다르지 않다. 1960~1970년대 정부의 지원 아래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집단이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독과점과 경제력 집중,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라는 부작용도 함께 키웠다.1980년 공정거래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출범한 배경이다.공정위는 정부 조직 가운데 가장 친시장적이어야 하는 기관이다. ‘금융검찰’로 불리는 금융위원회는 금융당국이지만,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위는 공정당국이 아니라 경쟁당국이다. 공정을 일구는 방식은 결국 경쟁이라는 의미다. 공정위는 시장의 심판이자 파수꾼이다.공정위를 두려워해야 하는 곳은 담합으로 가격을 올리고, 우월적 지위로 거래 상대방을 압박하며, 경쟁자를 배제하고 소비자를 기만하는 기업이어야 한다.그러나 최근 공정위의 칼날이 커지고 닿지 않는 곳이 없어지면서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과거의 악명이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기업들은 과징금보다 공정위 조사 자체가 더 두렵다고 말한다. 현장조사부터 자료 제출, 임직원 조사, 심의와 처분까지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비용과 경영 부담도 만만치 않다.조사 착수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주가와 평판은 흔들린다. 조사 대응과 법적 다툼에 막대한 비용이 들고, 투자와 신규 사업 추진도 위축된다.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법원에서 처분이 취소돼도 이미 투입한 비용과 놓친 사업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업들이 “세무조사보다 무섭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다.공정위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 최근 ‘물가당국이냐’는 비아냥을 들었던 생필품 담합 적발이 대표적이다. 현 정부 들어 성과가 드러났지만 실제로는 담당 부서가 이전 정부 때부터 오랜 기간 공들여 조사한 결과라고 한다. 이재명 정부 하명 조사는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만으로 시장의 의심을 거둘 수는 없다.공정한 심판이 되려면 조사 대상과 범위, 자료 제출 기준, 예상 처리 일정 등 절차와 진행 상황을 가능한 한 명확하고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조사 범위를 확대할 때도 그 필요성과 법적 근거를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법원에서 패소한 사건도 내부적으로 복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왜 처분이 취소됐는지, 조사 과정과 법리 판단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공개하고 재발 방지책을 내놓아야 한다.공정위 제재로 이미지와 신뢰에 타격을 입은 기업에는 처분 취소 사실이 시장에 충분히 알려질 수 있도록 명예를 회복할 기회도 보장해야 한다.제재 사실은 대대적으로 알리고 취소 사실은 판결문에 묻힌다면 공정하지 않다. 공정위의 권위는 기업과 소비자가 그 판단을 예측하고, 절차를 신뢰하며, 결과에 승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로 선다. 공정위가 현 정부 들어 설탕·밀가루·전분당·인쇄용지 4개 담합 사건에 부과한 과징금만 2조1500억원을 넘어섰다. 이는 2025년 전체 담합 과징금의 약 10배에 달한다.“공정위는 공정한가.”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공정위는 해명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2026.08.10 07:00

3분 소요
“아파트 대신 폐버스?”…청년주택 1만개 가능할까[팩트체크]

부동산 일반

폐기되는 버스 1만대를 개조하면 5000억원으로 청년들에게 주거공간 1만개를 공급할 수 있을까.황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폐버스를 활용한 이른바 ‘버스 하우스’를 청년 주거대책의 하나로 제안하면서 정치권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황 의원은 비싼 아파트나 원룸을 새로 짓는 대신 운행 수명을 다한 폐버스를 개조하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청년들의 단기 주거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하우스보트를 아이디어의 근거로 들었다. 황 의원은 연세대 대학원 도시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도시공학 전문가다. 해외에서 실제로 폐버스를 주거공간으로 활용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미국에서는 퇴역 스쿨버스를 주거공단을 활용한 ‘스쿨리(Skoolie)’가 있고 영국과 호주에서는 폐버스를 노숙인 숙소로 활용하는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노숙인과 이재민 등을 위한 긴급·임시주거 시설이거나 이동형 주택에 그쳤다. 황 의원 제안처럼 대규모 주거공간으로 활용한 사례는 없다. 버스를 ‘숙소’로 활용하는 것과 ‘주택’으로 전환하는 것은 다른 문제여서다. “1만 세대 5000억원”…황희 제안에 정치권 시끌논란의 시작은 황 의원이 지난 7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황 의원은 폐버스를 주거공간으로 리모델링해 대학가 청년들의 단기 주거공간으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그는 버스 한 대를 주거용으로 개조하는 데 약 5000만원이 든다고 가정하고 1만대를 개조하면 5000억원으로 1만 세대를 공급할 수 있다는 주장했다. 대학가나 지하철역 주변의 유휴공간에 버스를 배치하고 청년들이 안정적인 집을 구할 때까지 단기 거주하게 하자는 구상이다. 황 의원은 네덜란드 하우스보트를 참고 사례로 들었다. 네덜란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주택난 속에서 오래된 선박이나 바지선을 거주공간으로 활용한 것처럼 우리도 폐버스를 활용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국민의힘은 청년세대에 대한 모욕이라고 반발했다. 박충권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황 의원 본인과 가족들부터 당장 ‘버스 하우스 1호 입주자’로 들어가는 모범을 보이라”고 비판했다.45인승 버스 1만대를 통행 공간을 두고 배치하려면 최소 25만평가량이 필요한 만큼 그만한 부지가 있으면 고층 주택을 지어 공급하는 게 효율적이란 비판도 나왔다. 민주당은 “당 입장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의원 개인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고. 황 의원도 개인적인 아이디어 차원의 제안이었다고 해명 한 뒤 게시물을 삭제했다.그러나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황 의원의 발상이 아예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선 폐스쿨버스를 ‘22㎡ 소형 주택으로 개조 미국에서는 퇴역한 스쿨버스를 주거용으로 개조해 개인이 이동형 주택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시민단체가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소형주택로 만들어 제공하기도 한다.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오리건주의 ‘Vehicles for Changes’ 프로젝트다.퇴역 스쿨버스를 약 22㎡ 크기의 작은 집으로 개조해 노숙 아동과 가족이 생활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사업이다. 버스 내부에는 침실뿐 아니라 주방과 전기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설비를 설치했다. 영국 런던의 ‘Buses4Homeless’도 폐버스 활용의 대표적인 사례다.운행을 중단한 버스를 개조해 노숙인들에게 숙소와 식사, 직업교육 등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영국은 런던의 명물인 2층 버스를 개조해 숙박뿐 아니라 식사와 직업교육·복지 지원 공간으로 활용했다.목적은 장기 주택 공급이 아니라 노숙인의 자립을 돕는 ‘전환주거’다. 일정 기간 머물며 취업과 자립을 준비한 뒤 일반 주택으로 옮겨가도록 하는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이다.호주에서는 운행을 중단한 버스를 노숙인을 위한 야간 숙박시설로 개조해 제공하고 있다. 버스 안에는 에어컨을 갖춘 개별 수면 캡슐을 만들고 TV 등을 설치했다. 버스 한 대가 매일 밤 10~20명가량의 노숙인에게 잠자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버스를 개조하는 비용보다 매일 숙박시설을 관리하고 버스를 유지하는 운영체계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 사업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폐버스를 주거공간으로 바꾸는 기술적 장벽 자체는 높지 않다. 버스를 개조해 침실과 주방, 화장실 등을 갖춘 이동형 주택으로 활용하는 사례는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주거공간으로 활용하려면 차량을 장기간 세울 수 있는 별도 공간이 필요하고 전기·물·오수 처리시설을 확보해야 한다. 대부분 나라에서 버스 하우스를 개인 이동형 주택이나 노숙 가정을 위한 소규모 지원사업으로만 활용하고 있는 이유다. 황 의원이 사례로 제시한 암스테르담 하우스보트는 단순한 폐선박을 개조한 임시주택이 아니다. 계류권과 전기·상하수도, 각종 허가와 도시계획이 결합된 정식 주거 유형이다. 폐버스를 빈 공간에 배치해 단기 청년주택으로 활용하자는 구상과는 성격이 다르다. 버스 1만대를 어디에 세우나황 의원 구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버스 가격이나 개조비가 아니라 땅 문제다. 황 의원이 제시한 대당 5000만원은 버스를 주거시설로 개조하는 비용만이다. 버스를 세울 토지와 진입도로, 주차·보행 공간, 전기, 수도, 하수관로, 통신, 소방·안전시설을 설치하는 비용은 빠져 있다.황 의원은 대학가나 지하철역 인근 유휴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이런 지역일수록 서울에서도 땅값이 높고 유휴부지를 찾기 어렵다.토지 이용 효율도 따져봐야 한다. 아파트나 기숙사는 같은 땅 위에 수십층을 올릴 수 있다. 반면 버스는 기본적으로 한 층이다.버스 100대를 놓을 땅이 있다면 그곳에 청년기숙사나 모듈러주택을 지었을 때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월등히 많을 것이란 건 쉬운 계산이다. 두 번째 문제는 기반시설이다. 실제로 생활하려면 침대와 에어컨만으로는 부족하다. 화장실과 샤워실, 온수, 취사시설, 냉난방, 상수도, 오수·하수 처리시설, 전기와 인터넷이 필요하다.캠핑카처럼 청수·오수탱크를 설치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나 1만명이 장기간 거주하는 시설이라면 물을 계속 공급하고 오수를 수거해야 한다. 각 버스를 수도관과 하수관, 전력망에 연결하면 생활 편의성은 높아지지만 그때부터는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져 단층 컨테이너 주택과 마찬가지가 된다. 주거 편의성을 높일수록 고정식 주택과 비슷해지고, 이동성을 유지할수록 정상적인 주거환경에서 멀어지는 딜레마다.세 번째 문제는 주거의 질이다. 정치권에서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부분도 이 대목이다. 국토교통부가 정한 ‘최저주거기준’에 따르면 1인 가구 최소 주거면적은 14㎡다.또한 최저주거기준은 주택에 상·하수도시설을 갖춘 전용 입식부엌과 전용 수세식 화장실, 목욕시설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구조와 성능에서도 영구건물로서 구조강도를 확보하고 적절한 방음·환기·채광·난방시설과 전기시설, 화재 발생시 대피로도 확보해야 한다. 폐버스를 개조해 이같은 주거기준을 충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년주택보다 이재민 긴급주거 활용도 커 다만 ’청년 긴급·초단기 주거수단’이나 이재민용 긴급 주거수단으로는 검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예컨대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1~3개월 동안 취업활동을 하는 청년이나 단기 인턴, 대학 기숙사 입주를 기다리는 학생, 갑자기 기존 거처를 잃은 청년 등을 대상으로 활용할 수 있다.오히려 활용도가 더 높아 보이는 분야는 재난 이재민을 위한 긴급주거다. 산불이나 폭우, 지진 등으로 주택이 파손되거나 대피가 필요한 경우 버스의 이동성을 활용해 재난지역 인근으로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어서다. 체육관이나 임시대피소보다 사생활을 확보하기 쉽고, 침상과 냉난방·전기·간이 취사시설 등을 갖추면 복구기간 동안 머무는 임시거처로 활용할 수도 있다.실제로 해외 버스 하우스도 영구주택보다는 노숙인·이재민 등에게 일정 기간 거처를 제공하는 ‘주거의 중간 단계’에 가깝다.

2026.08.09 15:32

5분 소요
회의실 자리만 바꿔왔다…이사회 개혁이 놓친 것들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ESG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대규모기업집단 지배구조 분석은 한 가지 불편한 숫자를 담고 있었다.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의 99% 이상이 원안 그대로 통과됐고,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의 비율은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낮은 0.38%였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그 뒤에 있다. 사외이사 비율이 높을수록 원안 가결률이 조금은 낮아지는 경향이 확인됐지만, 사외이사가 이사회의 4분의 3을 넘는 회사조차 원안 가결률이 95%를 웃돌았다. 독립적인 이사를 아무리 많이 앉혀도, 회의실에서 반대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이 숫자를 이사들의 나태나 무능으로 읽는 것은 손쉽지만 정확하지 않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제대로 견제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사가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쥐고 있어야 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회의에서 입을 열 수 있어야 하며, 그 발언이 흩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보가 있는가, 발언할 수 있는가, 그리고 토론이 되는가. 셋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이사회는 아무리 독립적인 인물로 채워도 침묵하는 방이 된다. 앞의 99%라는 숫자는 바로 그 침묵의 크기다.문제는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가 이사회 제도 개선에 쏟은 에너지가 이 조건들 중 어느 것도 겨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외이사의 비율과 이사의 독립성 요건, 감사위원을 뽑는 방식. 논의는 온통 ‘누가 회의실에 앉는가’에 집중됐다. 지배구조라는 집의 하드웨어, 곧 이사회의 구성은 부지런히 손봤다. 하지만 그 집을 실제로 돌아가게 하는 소프트웨어, 곧 회의의 진행 방식과 이사에게 정보가 흘러드는 통로는 논의의 바깥에 남겨졌다. 좌석은 다 채웠는데 그 자리에서 오가야 할 말은 오가지 않는 것이다.이사들은 왜 회의실에서 입을 닫는가최근 나온 연구들은 바로 이 방 안의 풍경을 파고든다. 네덜란드 학자 마릴리케 엥버스가 2026년 발표한 논문 ‘Behind Closed Doors’는 실제 이사회 회의를 녹음하고, 참석 이사 전원을 따로 인터뷰해 회의실의 실상을 추적했다. 겉보기에 아무 갈등 없이 매끄럽게 끝난 회의를 두고, 이사들은 저마다 “사실 그때 이런 점이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문제의식은 있었으나, 아무도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엥버스는 이 침묵이 소심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침묵은 ‘지금 말할 자리가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관계가 상한다’ ‘말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등의 계산에 따라 작동하는 학습된 관행이었다. 더 뼈아픈 지적은 그 다음이다. 회의를 효율적으로 만들겠다며 짜 놓은 절차, 곧 촘촘한 안건과 빠듯한 시간과 위원회 분업이야말로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없는지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효율을 위한 장치가 도리어 침묵을 조장하는 셈이다.이사회 현장을 직접 촬영해 관찰한 연구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와 호주 연구진이 조건이 비슷한 두 공기업의 이사회를 비교했더니, 짧고 잦은 회의를 시간에 쫓겨 진행한 쪽에서는 안건마다 이사의 34%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반면 여유 있는 회의에서 의장이 발언권을 고루 돌린 쪽에서는 침묵한 이사가 15%에 그쳤다. 두 이사회를 가른 것은 이사 개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회의 시간과 의장의 진행 방식, 곧 회의의 설계였다.좌석을 채우는 개혁에서 회의를 바꾸는 개혁으로여기서 한국 기업을 위한 첫 번째 과제가 나온다. 이사들이 입을 열고 그 발언이 토론으로 이어지도록, 회의를 이끄는 사람의 역할을 다시 세워야 한다. 대표이사와 의장을 분리하는 일은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의장이 발언권을 고루 나누고, 이견이 오가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회의를 운영하는 진행자가 되는 일이다. 개별 이사의 독립성이나 전문성만이 아니라, 반대 의견이 안전하게 오가는 회의 문화를 갖추었는지를 이사회 평가의 핵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두 번째 과제는 남은 조건, 곧 ‘정보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발언권을 아무리 고르게 나눠줘도, 이사가 사안을 파악하지 못하면 던질 질문 자체가 없다. 미국 학자 스티븐 보이비 등은 2016년 연구에서 상시 감시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여러 회사를 겸임하며 1년에 몇 차례 모이는 사외이사가 거대하고 복잡한 기업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해 경영진을 실시간으로 감독하기란 애초에 무리라는 것이다. 우리 현실도 다르지 않다. 상장사가 내는 기업지배구조보고서에는 사외이사에게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제공하는지, 이를 전담할 인력을 두었는지를 적도록 되어 있지만 그 서술의 상당수는 형식에 그친다. 이사에게 감시 의무를 무겁게 얹으면서 정작 그 의무를 수행할 정보와 시간을 주었는지는 묻지 않은 것이다. 방향은 분명하다. 안건 자료가 회의 직전에 던져지듯 배포되어서는 이사가 사안을 파고들 여지가 없다. 이사들이 내용을 검토하고 미리 질문을 벼릴 수 있도록, 자료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사전에 전달돼야 한다.결국 엥버스가 던진 물음으로 돌아온다. 이사들은 하나같이 “우리 이사회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논의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회의실을 지배하는 것은 그 말이 아니라 침묵이다. 우리가 표방하는 이사회와 실제로 작동하는 이사회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지난 수년의 개혁은 회의실의 자리를 새로 채웠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자리에 앉은 이사가 판단할 정보를 손에 쥐고 입을 열 수 있으며, 그 발언이 살아 있는 토론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누구를 앉힐지를 넘어, '그들이 어떻게 일하게 할지'를 물어야 한다. 개혁의 시선은 이제 회의실 문 안으로, 이사회의 회의 진행표와 자료 봉투 위로 옮겨가야 한다.

2026.08.08 09:00

4분 소요
피코팩, 지식재산처 추천 ‘혁신 프리미어 1000’ 선정

경제일반

-누적 투자 98억원·스케일업팁스 선정 이어 기술·사업화 역량 평가-정책금융과 연구개발, 투자유치·해외 진출 연계 지원 기반 확보 차세대 디지털 엑스레이(X-ray) 플랫폼 전문기업 피코팩이 정부 혁신기업 육성 프로그램인 ‘혁신 프리미어 1000’ 대상 기업으로 선정됐다고 밝혔다.피코팩은 지식재산처의 추천을 받아 심사를 거쳐 최종 명단에 포함됐다. 회사 측은 보유 지식재산권과 기술 경쟁력, 사업화 역량 등이 선정 과정에서 종합적으로 평가됐다고 설명했다.혁신 프리미어 1000은 혁신성과 성장 가능성을 갖춘 중소·중견기업을 발굴해 정책금융과 연구개발, 투자유치, 컨설팅, 해외 진출 등을 연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피코팩은 원천기술과 지식재산을 기반으로 차세대 디지털 엑스레이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의료 분야를 중심으로 산업 검사와 보안, 국방 등으로 기술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이번 선정에 따라 피코팩은 한국산업은행과 IBK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한국성장금융 등 정책금융기관의 지원 프로그램을 연계해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정책금융 외에도 연구개발과 투자유치, 기술·경영 컨설팅, 해외 사업화 등 기업의 성장 단계에 필요한 지원을 검토할 수 있다. 구체적인 지원 규모와 조건은 기관별 심사와 사업 절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피코팩은 최근 민간 투자와 정부 연구개발 사업에서도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 벤처캐피털 등으로부터 유치한 누적 투자금은 98억원이다.중소벤처기업부가 추진하는 ‘2026 스케일업팁스’ 연구개발 과제의 주관기관으로도 선정돼 차세대 디지털 엑스레이 플랫폼의 기술 고도화와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다.회사 측은 이번 혁신 프리미어 1000 선정을 통해 민간 투자시장에서 평가받은 사업성과 정부 연구개발 사업에서 인정받은 기술력에 이어 지식재산 경쟁력까지 추가로 검증받았다고 설명했다.향후 핵심 지식재산과 원천기술을 활용해 제품 성능을 개선하고 의료 이외의 산업 분야로 적용 대상을 넓힐 계획이다. 해외 시장 진출에 필요한 인증과 사업화 기반 구축도 추진한다.오근영 피코팩 대표는 “이번 선정은 회사가 보유한 지식재산과 기술, 사업화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받은 결과”라며 “투자 유치와 스케일업팁스 선정에 이어 성장 기반을 한층 확대하게 됐다”고 말했다.이어 “핵심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제품 경쟁력을 높이고 산업·보안·국방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글로벌 디지털 엑스레이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밝혔다.

2026.08.04 13:55

2분 소요
팔아야 하나 버텨야 하나…'롤러코스피' 대처법

전문가 칼럼

불과 얼마 전까지 시장은 ‘코스피 1만 시대’를 이야기했다.인공지능(AI) 혁명과 반도체 슈퍼사이클, 기업 밸류업, 외국인 자금 유입이 맞물리면 한국 증시가 만년 저평가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가 넘쳐났다. 코스피 5000은 종착지가 아니라 1만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 여겨졌다.그러나 가파른 상승으로 누적된 가격 부담 위에 미국의 금리 불확실성과 미·중 갈등, 글로벌 기술주 조정, 반도체 고점 논란, 이란전쟁 장기화 등이 한꺼번에 덮치자 시장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정부는 증시 부양과 자본시장 선진화를 혼동해 기름을 부었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상품 도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해외로 빠져나가는 투자 수요를 국내 시장으로 돌리고 투자자의 선택권을 넓히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처럼 변동성이 큰 종목에 일일 수익률의 두 배를 추종하는 상품까지 얹자 시장의 진폭은 더욱 커졌다. ‘롤러코스피’에 지친 투자자들은 국내에 머무르기는커녕 오히려 해외 증시로 빠져나갔다.레버리지 상품은 주가가 오르면 기초자산을 더 사고, 내리면 더 파는 방식으로 매일 포지션을 조정한다. 시장이 안정적일 때는 충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급락장에서는 리밸런싱 매도와 신용거래 반대매매가 같은 방향으로 겹친다. 작은 불씨가 산불로 번질 수 있는 구조다.사후 대책도 미흡하다. 예탁금 기준을 높이고 투자자 교육 시간을 늘리는 식으로 입구만 좁혀서는 시장의 변동성을 줄이기 어렵다.변동성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신규 매수와 설정을 자동으로 제한해야 한다. 신용융자와 레버리지 ETF를 결합한 사실상의 ‘이중 레버리지’도 차단할 필요가 있다.한국 증시 저평가 문제는 정치 구호와 금융 상품 몇 개로 해결되지 않는다. 기업 실적 개선과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 예측 가능한 주주환원 등 증시의 기초체력부터 다져야 한다.장기 투자자에게 세제 혜택을 주고, 연기금과 퇴직연금이 국내 우량주를 오래 보유할 수 있도록 운용 구조를 바꾸는 일도 필요하다. 단기 거래량을 늘리는 정책이 아니라 장기 자금을 시장에 머물게 하는 정책이 진짜 증시 부양책이다.한국 증시의 상승 동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AI 혁명이 불러온 반도체 슈퍼 사이클은 끝나지 않았다.SK하이닉스가 보여준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경쟁력과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이 이를 방증한다. 최근의 급락이 AI 산업의 붕괴가 아니라 과도한 기대와 수급 불안이 겹친 조정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중국의 추격은 분명 위협적이다. 막대한 내수시장과 정부 지원, 빠른 기술 흡수력을 앞세워 메모리와 AI 반도체 분야에서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그러나 첨단 공정의 수율과 HBM 양산 경험, 글로벌 고객사와의 신뢰, 장비·설계 생태계에서는 여전히 격차가 크다. 미국의 첨단 장비·기술 통제로 세계 시장 확장에도 제약이 따른다. 중국이 강력한 경쟁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당장 K-반도체를 대체할 대항마가 되기에는 기술 격차와 확장성에서 한계가 뚜렷하다.결국 코스피가 다시 1만을 향할 수 있느냐는 질문의 답은 두 갈래에 있다.정부는 투기적 수요를 자극하는 부양책 대신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장기 투자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투자자는 지수의 하루 등락이 아니라 AI혁명이 계속 될 지, 한국 기업의 이익 창출력이 살아 있는지를 봐야 한다.폭락장은 누구에게나 공포스럽다. 하지만 공포에 팔고 환호에 사는 투자를 반복해서는 ‘벼락거지’가 될 뿐이다.급등과 급락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 결국 ‘존버’가 이긴다.

2026.08.0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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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도 은행도 지방에서 ‘한숨’…수도권과 차이 어디서 났나

은행

한국 경제의 수도권과 지방 간 격차가 단순한 산업 불균형을 넘어 금융 부실의 위험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도권이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 호조·증시 활성화 등에 힘입어 경기 회복의 온기를 누리는 반면, 지방 경제는 석유화학·건설 부진과 내수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6년 상반기 권역별 경제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대비 상반기 권역별 경기는 수도권이 확실한 개선세를 보였다. 반면 동남권·호남권·강원권은 보합세에 머물렀다. 충청권·대경권·제주권 역시 소폭 개선에 그쳐 수도권과의 격차를 줄이지 못했다.수도권과 비수도권의 희비는 반도체와 수출 산업이 갈랐다. 수도권에서는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 확대와 D램·낸드플래시 가격 강세에 따른 반도체 수출 호조의 수혜를 집중적으로 누렸다. 반면 지방의 주력 산업들은 글로벌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고환율·건설 경기 악화의 타격을 받았다.문제는 실물경기 양극화에 따른 지방 기업 약세가 지방은행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수도권 대기업과 우량 차주를 중심으로 대출을 운용하는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방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지방은행들은 연체율 상승에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다.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5개 지방은행(경남은행·광주은행·부산은행·전북은행·제주은행)의 올해 2분기 말 평균 연체율은 1.33%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동기(1.19%) 대비 0.14%포인트(p) 높아진 수치다. 2024년 말 0.79%로 0%대를 유지했던 지방은행의 연체율이 불과 1년6개월 만에 1.3%대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1분기 말(1.25%)보다 높은 수준이다. 같은 기간 5대 시중은행의 평균 연체율은 0.39%였다.연체율 상승에 따라 손실에 대비한 대손충당금 적립 부담이 급증했다. 이 때문에 5개 지방은행의 올 상반기 당기순이익은 606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69억원 감소했다.지역별 대출 부실 현황을 들여다보면 지방 경제가 처한 현실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대구 지역의 국내 은행 기업대출 연체율은 1.29%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광주(1.09%)와 제주(1.09%) 역시 기업대출 연체율이 1%를 웃돌았다.가계대출 연체율도 비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치솟았다. 제주의 가계대출 연체율이 1.24%로 전국 최고치를 보였고 ▲전북(0.84%) ▲광주(0.62%) 등이 뒤를 이었다. 경기 부진으로 매출은 줄어드는데 고금리에 따른 이자 상환 부담까지 커지면서 지역 중소기업과 가계가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IBK기업은행이 발표한 ‘2026년 중소기업 금융실태조사’에 따르면 내년 경영 상황을 ‘부진’으로 전망한 중소기업 비중이 25.7%로 나타났다. 올해 전망치(14.8%)보다 10.9%p 확대됐다.금융권 관계자는 “지방 경제의 침체가 기업 부실과 지방은행 연체율 상승, 기업 자금난 심화, 지역 경제 악화라는 악순환의 구조로 이어지고 있다”며 “반도체 훈풍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지방 취약차주와 중소기업을 위한 맞춤형 금융 지원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2026.07.3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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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반도체 호황으로 수도권 경기 개선…건설업은 부진”

은행

올해 상반기 반도체 산업 호조로 수도권 경기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한국은행은 29일 지역경제보고서를 통해 “올해 상반기 지역경제는 수도권이 지난해 하반기보다 개선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충청권·대경권·제주권의 지역경제도 소폭 개선 됐지만, 동남권·호남권·강원권은 보합세를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수도권·충청권·제주권에서는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 확대에 따른 반도체 호황으로 제조업이 호조를 보였다. 대경권도 휴대전화·부품과 철강을 중심으로 생산이 소폭 늘었다. 반면 동남권과 호남권은 석유화학·정제 부진에 애를 먹었고 강원권은 시멘트와 자동차부품 생산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제조업 생산의 경우 수도권은 반도체, 동남권은 자동차와 조선, 호남권은 철강 및 반도체, 강원권은 의료기기, 의약품 등을 중심으로 개선될 전망”이라고 진단했다. 서비스업은 소비심리 개선과 정부의 소비 진작 정책 영향으로 모든 권역에서 상승세를 나타냈다. 수도권은 증시 호조로 금융·보험업이 증가했고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등이 양호한 성장세를 보였다. 자른 권역에서도 소비심리 개선, 내·외국인 관광객 증가 등으로 도소매업과 숙박·음식점업이 살아났다. 반면 건설업 생산은 부진이 이어졌다. 한은은 중동사태에 따른 공사비 상승과 자재 수급 불안이 건설업의 하방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호남권과 제주권은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집행 확대 등의 영향으로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생산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민수 한은 지역경제조사팀장은 “반도체 공장 증설 기대감과 공공부문 인프라 착공 기대 등으로 수도권과 충청권·강원권을 중심으로 소폭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수도권의 상반기 주택매매가격(월평균)은 지난해 말 보다 0.4% 상승했다. 작년 하반기(+0.4%)와 비슷한 흐름이 이어졌다. 동남권, 호남권에서는 상승폭이 확대됐고 강원권은 상승 전환했다. 충청권과 대경권은 하락세를 보였으나 그 폭이 좁혀졌다. 제주권에서만 하락폭이 확대됐다.1∼5월 중 권역간 인구이동(전년 동기대비)을 보면 수도권으로 인구 1만8000명의 인구가 순유입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순유입(2만8000명)보다는 1만명 줄었다. 한은은 “하반기 지역경제는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제조업의 견조한 성장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부분 권역에서 소폭 개선되거나 상반기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2026.07.2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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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두렵다

경제일반

가을이 두렵다.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이른바 노란봉투법의 진짜 시험대는 올가을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원청에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파업에 들어가는 하청업체들이 줄을 잇는 시점이 이때쯤 될 것으로 보여서다. 자동차와 조선, 철강, 반도체 공장은 수많은 원·하청업체가 촘촘하게 연결돼 있는 하나의 공급망이다. 단 하나의 핵심 공정만 멈춰도 생산 공장 전체가 설 수 있다. 반도체의 마지막 단계인 패키징 공정을 담당하는 협력업체 노조나, 공장에서 하역장으로 제품을 실어 나르는 운송업체 노조가 원청과의 교섭 결렬을 이유로 파업에 들어간다고 가정해 보자.작은 하청업체의 노사분쟁이 수만 명이 일하는 공장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얘기다. 노란봉투법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리스크다.이재명 대통령도 뒤늦게 문제를 제기했다. 공장 신설과 투자를 비롯해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으로 요구하는 이른바 ‘N% 성과급’까지 노동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과도하지 않으냐는 취지다. 노동쟁의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지지 않도록 대통령령이나 시행규칙, 행정지침 등을 통해 기준을 마련하라고도 지시했다.대통령의 우려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이미 예고돼 있었다.노란봉투법 제정 때부터 많은 전문가와 경영계는 사용자와, 노동쟁의의 범위가 지나치게 불명확하다고 경고했다. 노란봉투법은 법원 판결문에 등장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배·결정’이라는 표현을 끌어와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은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넓혔다. 여기에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의 결정’까지 노동쟁의 대상으로 포함했다.누가 사용자인지, 원청이 무엇을 교섭해야 하는지, 공장 신설과 이전·투자·사업 매각 같은 경영상 판단 중 어디까지 파업의 대상이 되는지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은 탓에 법원 판결이 쌓여야 혼란이 해소될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호남 반도체 공장 신설 문제를 교섭 의제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장 입지가 근무지와 고용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라면 거의 모든 투자 결정이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N% 성과급 문제에서도 정부는 자유롭지 않다. 삼성전자 노조가 파업을 앞세워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으로 요구했을 때 정부는 중재에 나서 협상 타결을 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이 교섭이나 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면 “당시에는 왜 협상을 중재했느냐”는 질문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더 큰 문제는 법률이 열어 놓은 문을 시행령이나 행정지침으로 닫겠다는 발상이다. 하위 규정으로 상위 법률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부가 무리하게 지침을 만들면 노동계는 입법 취지를 훼손했다고 반발하고, 법원에서는 위임 범위를 벗어났는 지를 두고 소송이 잇따를 것이다. 자칫 현장의 혼란을 줄이기는커녕 새로운 법적 분쟁만 더할 수 있다.해법은 보완입법이다. 공장 신설과 이전, 투자 규모와 사업 매각 같은 경영상 결정 자체와 그 결정이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미치는 영향을 구분해야 한다. 기업의 투자 여부는 경영의 영역으로 두되 그 결과 발생하는 해고와 전환배치, 근무지 변경, 고용보장과 보상만 제한적으로 노사가 교섭하도록 해야 한다.원청의 사용자 책임도 원청이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근로조건으로 한정해야 한다. 하청업체가 결정할 사안까지 원청에 교섭 책임을 묻거나, 원청이 통제할 수 없는 요구를 놓고 하청노조의 파업을 허용하면 교섭은 애초부터 타결될 수 없다. 쟁의행위 역시 원청 사업 전체를 무차별적으로 멈춰 세우지 못하도록 대상과 범위를 명확히 정해야 한다.가을이 오면 법률 문구를 둘러싼 논쟁은 공장 문 앞의 현실이 될 것이다. 하청노조들이 노란봉투법을 앞세워 파업의 깃발을 들고 공장을 세우는 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출이 흔들리고 일감이 끊기며 노동자의 일자리까지 위태로워진다. 공장이 멈추면 한국 경제도 멈춘다.늦었지만 아주 늦지는 않았다. 시행령과 지침으로 '땜빵' 할게 아니다. 국회가 만든 불확실성은 국회가 걷어내야 한다. 노란봉투법에 담긴 청구서가 올가을 산업현장과 한국 경제를 흔들기 전에 정부와 국회가 보완입법에 나서야 한다.

2026.07.27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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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대신 소송만 키웠다…‘분쟁 촉진법’ 된 노란봉투법

경제일반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 시행 4개월만에 현장에서 잇단 파열열음을 내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보완입법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노란봉투법 제정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원청도 하청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면 사용자로 인정하도록 범위를 넓혔지만, 정작 사용자성을 판단할 구체적인 기준과 원·하청 교섭 절차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특히 지난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구 노동조합법 아래에서는 원청과 하청근로자 사이에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경우 원청에 단체교섭 의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 노란봉투법이 기존 판례를 명문화한 것이라는 입법 당시 설명도 흔들리고 있다.한국사회법학회와 노동법이론실무학회, 미래노동법혁신연구회는 24일 서울 중구 상연재 별관에서 ‘HD현대 전원합의체 판결과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시행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주제로 특별공동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입법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다뤄졌다.“노란봉투법 판례 명문화 아닌 새로운 입법”논쟁의 출발점은 대법원이 지난 5월 21일 선고한 HD현대중공업 전원합의체 판결이다.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원청인 현대중공업에 산업안전과 고용보장, 노조활동 보장 등을 놓고 단체교섭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근로계약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대법원 다수의견은 구 노조법상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는 원칙적으로 ;근로자와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 관계를 맺은 자'다. 원청이 하청노조 활동에 지배·개입하지 않을 소극적 의무를 지는 것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교섭해야 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는 취지다.대법원은 단체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해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원청에 적극적인 단체교섭 의무까지 인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고,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사용자의 범위를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다만 이번 판결은 올해 3월 10일 시행된 개정 노조법이 아니라 과거 법률관계에 구법을 적용한 판단이다. 노란봉투법 자체가 무효라거나 원청 사용자성을 부정한 판결은 아니다.그럼에도 노동법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로 노란봉투법의 성격이 분명해졌다고 평가했다. 노란봉투법이 기존 판례를 그대로 법률에 옮긴 것이 아니라, 종전 법리에 없던 원청의 단체교섭 책임을 새로 만든 ‘창설적 입법’이라는 것이다.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원청과 하청근로자 사이에 직접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경우 원청에게 단체교섭 의무가 없다는 기존 법리가 재확인됐다”며 “개정 노동조합법은 기존 법리를 확인한 입법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을 창설한 입법”이라고 말했다. 사용자 정의 한 줄 바꾸고 교섭제도는 방치전문가들이 보완입법 필요성을 제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노란봉투법이 사용자 정의만 확대했을 뿐 이를 뒷받침할 제도를 함께 고치지 않아서다. 노란봉투법은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면 사용자로 본다.그러나 법률에는 어느 정도 권한과 영향력이 있어야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는지, 임금·근로시간·산업안전·고용승계 등 교섭 의제마다 사용자를 따로 판단해야 하는지에 관한 세부 기준이 없다.양주열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노란봉투법 사용자성 판단을 위한 구체적인 형식적·실질적 요건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법원의 판단 기준이 쌓일 때까지 노사가 교섭보다 법적 다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교섭창구 단일화와 교섭단위 분리도 풀리지 않은 문제다. 기존 노조법은 한 사업 또는 사업장에 복수노조가 있으면 교섭창구를 단일화하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원청 정규직노조와 여러 하청업체 노조가 동일한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할 경우 누구를 하나의 교섭단위로 묶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원청노조와 하청노조가 하나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하청노조만 별도의 교섭단위를 구성해야 하는지, 여러 하청업체 노조 가운데 누가 대표권을 갖는지에 따라 교섭 구조가 크게 달라진다.고용노동부는 원청노조와 하청노조의 교섭단위를 사실상 구분하는 내용의 상생교섭절차 매뉴얼을 내놨지만, 현행 법률만으로 같은 사용자 아래 복수로 교섭 단위를 나눌 수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양주열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하청노조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서 무수히 많은 법률 해석 문제와 기존 제도와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며 “제대로 된 교섭보다 노사 간 분쟁만 증가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이어 “현재의 노란봉투법만으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구체적인 제도 설계를 바탕으로 추가적인 입법이 필요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판례 축적 비용을 왜 현장이 부담하나”현장에서는 법원의 판례가 축적되면 불명확성이 해소될 것이라는 입법 당시 설명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됐다.김인식 공인노무사는 “시간이 지나 판례가 쌓이면 법률 내용이 명확해진다고 하지만 그 사례가 누적되는 동안 발생하는 고통과 갈등, 피해를 왜 현장 노사가 부담해야 하느냐”고 지적했다.사용자성 판단을 판례 형성에만 맡길 경우 노사는 장기간 노동위원회와 행정소송, 민·형사절차를 거쳐야 한다. 사용자성이 인정되면 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 형사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인정되지 않으면 하청노조는 실제 근로조건을 결정할 권한이 없는 하청업체만을 상대로 교섭해야 한다.법원의 최종 판단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실 입법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개별 기업과 노조에 전가된다는 지적이다.김희성 한국사회법학회 회장은 “노란봉투법은 사용자성 판단 기준의 불확실성과 개념의 모호성, 단체교섭 및 노동쟁의 범위의 과도한 확대, 손해배상 제한 설계의 결함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이어 “후속 입법과 보완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개정 노조법은 ‘대화 촉진법’이 아니라 ‘분쟁 촉진법’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26.07.2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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