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오피니언

오피니언

순창의 시간이 남기는 맛을 기록하다 [길에서 만난 사람]

전문가 칼럼

전북 순창군 발효테마파크 햇살라운지. 창밖으로 순창의 나지막한 능선이 겹겹이 겹치며 고요한 수묵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지난달 이곳에서 여행 작가 김민수가 1년 6개월간의 긴 호흡을 담은 보고서를 내놨다. 제주에서 10년 넘게 민박집을 운영하며 수많은 방랑자에게 이정표를 제시해 온 그가 제주의 눈부신 수평선 대신 순창의 붉은 흙과 눅진한 장 냄새 배어 있는 골목에 스며든 500일의 결과물, 에세이 『문득 끌리는 순창 여행』이다.그는 왜 제주의 광활한 푸른 바다를 뒤로하고 순창의 소박하고도 깊은 내륙의 골목을 택했을까. 그는 이번 작업이 단순히 유명 명소를 훑고 지나가는 ‘단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장을 익히듯 스스로를 발효시키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한다.누룩처럼 쓰리고 정처럼 읽는다이날 북콘서트에서 청중의 마음을 가장 깊게 파고든 문장은 이 책의 첫머리였다. “순창의 여행에는 깊이가 있다. 누룩처럼 쓰리고 정처럼 읽는다.”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익은’ 상태가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채기와 인내를 뜻하는 듯한 ‘쓰리고’라는 표현은 현장의 많은 이들에게 묘한 울림을 주었다. 행사에 참석한 한 공직자는 “수많은 홍보 책자를 접해왔지만 누룩처럼 쓰리다는 첫 문구를 보고 나선 처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 진정성에 공감을 표했다.김 작가는 이 투박하면서도 진실한 깊이를 담아내기 위해 1년 6개월간 순창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취재를 위해 순창의 굽이진 길을 오가며 깨달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과거 전국의 섬을 낱낱이 누비며 『대한민국 100섬 여행』을 펴냈을 때만큼이나 많은 공력과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는 화려하게 치장된 관광지가 아닌, 빨래가 널려 있는 마당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당처럼 주민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속살’에 집중했다. 낡은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매일 읍내를 걷는 산책자로 지낸 500일의 시간은 그렇게 정직한 문장이 되었다.발효된 여행자에게만 들리는 이야기김 작가는 순창의 여행을 ‘발효’ 그 자체에 비유한다. 봄에 정성껏 담근 장이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맛을 내듯, 순창의 매력도 성급한 방문객에게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 여행자에게만 순창은 그 비장(秘藏)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8년 전 순창의 ‘금산여관’에 머물렀던 여행자가 자신의 88번째 생일을 맞아 제주에서 다시 이곳을 찾아오고,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단골손님이 자연스럽게 빗자루를 들어 마당을 쓰는 풍경이 이곳에선 일상적인 인연의 형태다.“순창은 충분히 발효된 여행자에게만 더욱 깊고 내밀한 이야기를 건넵니다. 흰 눈에 덮인 겨울 강천산의 적막함을 온몸으로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듬해 봄의 정취가 왜 그토록 오롯한지 이해되는 식이죠.” 그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인스턴트 여행’이 아닌, 기다림이 남긴 진한 장맛 같은 여행을 권한다. 그것은 한 번의 방문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여러 번의 마주침이 쌓여 만들어지는 깊이다.그가 꼽은 가장 강렬한 동화(同化)의 순간은 뜻밖에도 유명 관광지가 아닌 읍내 중식당 ‘춘화루’의 평범한 오전 11시 풍경이었다. “오전 밭일을 마친 주민들이 참을 먹듯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단함을 털어내는, 그야말로 짙은 로컬의 현장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이방인인 저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거나 경계하지 않았죠. 그들의 무관심 속에 섞여 들어가 풍경의 배경이 되는 순간, 저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그는 이를 ‘묽어지는 것’이라 표현했다.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특별해지고 싶은 욕심이 순창이라는 담백한 공간과 만나 희석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타협과 양보가 필요한 동반 여행이나 SNS를 의식한 인증샷 위주의 여행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혼자만의 여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차원적인 경험이다. 내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찰나의 평온이다. 자발적 고독을 자처할 때 보이는 것들김 작가는 이번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순창의 또 다른 보석으로 유등면의 ‘유등스테이’를 언급했다. 고택의 결이 살아있는 한옥에서 아보카도 커피를 마시며 고성능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경험은, 순창의 정서가 어떻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미감으로 진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투박한 시골 정서와 세련된 취향이 공존하는 이 공간은 순창이 가진 무궁무진한 스펙트럼을 증명한다.그는 순창을 찾을 예비 여행자들에게 진심 어린 당부를 남겼다. “타인의 ‘좋아요’를 위해 맛집을 전전하고 카메라 렌즈로만 세상을 보는 여행에 지쳤다면 순창으로 오십시오. 대신, 반드시 혼자 오십시오.”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라는 소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롯이 자기 내면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 그는 순창의 나지막한 능선과 깊은 숲길이 그 고독한 독백을 묵묵히 받아줄 만큼 넉넉한 품을 가졌음을 500일의 기록으로 증명해 보였다.행사장 밖으로 나오자, 군청 앞 음악 분수대가 화려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시범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의 진짜 여운은 솟구치는 물줄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혼자 오라”던 작가의 나직한 목소리와 순창의 밤공기 속에 더 짙게 배어 있었다.

2026.05.02 10:00

4분 소요
계급장 뗀 진검승부 와인 역사를 바꾸다 [와인인문학]

전문가 칼럼

197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와인(포도주) 시장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헌법은 단 한 줄로 요약됐다. 위대한 와인은 오직 프랑스에서만 탄생한다는 것이다. 수백년간 축적된 떼루아(포도 재배 환경)의 신비와 귀족적인 샤토(저택)의 전통 그리고 프랑스인 특유의 콧대 높은 미각적 우월감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과 같았다.물론 이처럼 오만한 패러다임은 단숨에 산산조각이 났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6년 5월 24일 파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단 한 번의 시음회가 변화의 바람을 불러왔다. 업계에서는 와인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통쾌한 반전이자 신분제가 지배하던 미각의 세계에 ‘민주주의와 다양성’이라는 혁명을 선포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다.들러리로 초대된 이방인의 반전사건의 발단은 파리에서 와인 숍을 운영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의 작은 기획에서 시작됐다. 그는 미국의 독립 선언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과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무명 와인들을 비교 시음하는 이벤트를 열기로 했다.당시 이벤트에 초청된 심사위원단 9명은 프랑스 와인계의 ‘어벤져스’와 같았다. 프랑스 원산지명칭통제제도(AOC) 협회장부터 최고급 레스토랑 투르 다르장의 수석 소믈리에 그리고 로마네 꽁띠의 오베르 드 빌렌느까지 이름만으로도 권위가 묻어나는 최고 권위자들이었다.심사에 오른 프랑스 와인들의 면면 역시 화려했다. 레드 와인 부문에는 보르도 1등급인 샤토 무통 로쉴드와 샤토 오브리옹이, 화이트 부문에는 부르고뉴의 뫼르소와 바타르 몽라셰 등 최고의 명품들이 출전했다.시음회는 와인의 라벨을 가리고 맛과 향으로만 평가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방식으로 진행됐다. 모두가 프랑스 와인의 호평을 예상했지만 라벨이라는 ‘계급장’이 떨어져 나가자 예상 밖 결과가 나왔다. 세계 최고의 미각을 자부하던 프랑스 전문가들의 입에서 촌극이 빚어지기 시작했다.심사위원들은 와인잔을 돌리고 향을 맡으며 우아한 프랑스어로 “이 우아한 골격과 깊은 풍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랑스 보르도의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극찬하며 최고점을 준 그 와인은 캘리포니아산 카베르네 소비뇽이었다.이는 인간의 미각이 얼마나 시각적 정보와 편견에 얇게 의존하고 있는지 ‘권위’라는 이름의 후광 효과가 얼마나 우리의 본질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지가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라벨과 역사라는 편견의 안경을 벗겨내자 프랑스인들의 절대 미각은 길을 잃고 방황했다. 파리의 심판이 남긴 유산모든 시음이 끝나고 점수가 집계되자 회담장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과였기 때문이다. 화이트 와인 1위는 미국의 ‘샤토 몬텔레나 1973’이 차지했다. 레드 와인 부문에서는 보르도 1등급을 제치고 미국의 ‘스택스 립 와인 셀러 1973’이 영광의 1위 자리에 올랐다. 수백년의 역사와 혈통을 자랑하는 구체제의 귀족들이 캘리포니아의 촌뜨기 농부들에게 완벽하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당시 현장에 참석했던 미국 타임지의 조지 테이버가 이 통쾌한 반전극을 ‘파리의 심판’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타전하면서 이 사건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결과가 아니다. 파리의 심판이 와인 역사에 남긴 위대한 유산은 단순히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이겼다는 ‘승패’에 있지 않다. 이 사건은 수백년간 굳게 닫혀 있던 와인 시장의 거대한 문을 열고 글로벌 다양성의 시대를 알리는 혁명의 축포로 평가된다.이전까지 와인의 세계는 ‘운명론’이 지배했다.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의 축복받은 혈통을 갖지 못하면 결코 위대한 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숙명이었다. 그러나 나파밸리의 승리는 전 세계의 이름 없는 와인 생산자들에게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의 성공에 고무된 칠레·호주·아르헨티나·뉴질랜드 등 ‘신대륙’의 양조가들이 자신감을 얻고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변방의 반란이 종주국을 각성시키고 전 세계 소비자들이 다양하고 훌륭한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미식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한 잔의 와인을 평가할 때 우리는 종종 그 안에 담긴 액체의 본질보다 병 겉면에 붙은 화려한 라벨과 가격표에 쉽게 현혹된다.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고 사회적 가치를 매길 때 역시 그 사람의 내면이나 실력보다는 출신 학교·직함·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라는 보이지 않는 ‘라벨’에 의존해 무의식적인 서열을 매기고 있지는 않은가.1976년 파리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시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인문학적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삶 속에서 편견의 안경을 벗고 눈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낄 용기가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길 바란다.오늘 밤 여러분의 식탁에 칠레산이나 이름 모를 국가의 평범한 와인이 놓여 있다면 잔을 들어 기쁘게 건배하자. 그 와인 속에는 편견과 계급장을 떼어낸 채 실력 하나로 쟁취해 낸 자유롭고도 다채로운 근현대사의 통쾌한 반전이 녹아 있다. 파리의 심판이 쏘아 올린 다양성의 축포는 절반쯤 남은 우리들의 잔 속에서 여전히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다.

2026.05.02 09:00

4분 소요
디지털자산기본법, 그릇과 음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스페셜리스트 뷰]

가상화폐

가상자산 2단계 입법인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정부안이 국회 제출을 앞두고 있고, 여당안과의 절충도 임박했다. 정부와 여당은 이번 회기 내 처리를 목표로 속도를 내고 있고, 시장 참여자들의 관심도 발행 인가 요건과 거래소 지배구조 같은 세부 쟁점에 집중돼 있다.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빠져 있다. 이 법은 무엇에 관한 ‘기본법’이어야 하는가.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격, 거래소 대주주 지분율 한도, 은행 컨소시엄 51% 룰 같은 세부 규제 논쟁의 그늘에 가려, 디지털자산의 법적 본질과 그에 부합하는 규율 구조에 대한 근본적 진단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본법은 본래 한 영역의 정의·분류·기본 원칙·관할 분담을 정리하는 법이다. 한국의 「디지털자산기본법」은 그 본래 역할을 하고 있는가.먼저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디지털자산은 그 자체로 금융상품이 아니다. 분산원장에 전자적 형태로 표상된 가치 또는 권리일 뿐이다. 무엇을 기반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법정통화에 연동되면 결제 수단이 되고, 증권을 기초로 하면 투자상품이 되며, 부동산이나 미술품을 기반으로 하면 실물자산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토큰화는 자산의 형식을 바꾸는 기술이지, 본질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다.이 원칙은 이미 국내 정책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금융당국이 토큰증권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그릇이 바뀌어도 음식은 바뀌지 않는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비증권 자산까지 금융 규제 틀 안에 일괄 편입하려는 현재 입법 방향은 이러한 원칙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같은 디지털자산이라 하더라도 사용 목적에 따라 법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결제에 사용되는 비트코인과 투자 대상으로 보유되는 비트코인은 동일한 자산이지만 규율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를 하나의 법 체계로 묶는 것은 기술 기반 자산의 다양성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접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출발선에서부터 잘못된 전제를 놓고 설계를 시작한 셈이다.글로벌은 이미 결론 냈다…‘본질별 분리 규율’해외 주요국의 디지털자산 입법 공통 기조는 ‘자산 본질에 따른 분리 규율’이다. 미국은 지난해 7월 「GENIUS법」으로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의 연방 규제 체계를 처음 마련했다. 그러나 이 법의 핵심은 발행인 인가나 100% 준비자산 의무가 아니다. 결제 스테이블코인을 연방 증권법상 ‘증권’ 정의와 상품거래법상 ‘상품’ 정의에서 명시적으로 제외시킨 점이다. 결제 기능을 수행하는 토큰은 SEC가 아니라 재무부와 OCC가 감독한다. 자산의 경제적 실질에 따라 주관 부처를 달리한 것이다. 시장구조 입법인 「CLARITY법」 역시 같은 사고방식 위에 서 있다. 이 법은 SEC와 CFTC의 관할을 자산 성격별로 명확히 나누어, 디지털 상품 현물시장은 CFTC가, 투자계약자산은 SEC가 관할하도록 한다. 같은 시기 SEC 의장 폴 앳킨스는 ‘Project Crypto’를 선언하며 “과거 SEC가 무어라 말했건, 대다수 암호자산은 증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그는 토큰을 ▲디지털 상품(network token) ▲디지털 수집품(NFT 등) ▲디지털 도구(회원권·티켓·신분증 등 실용 토큰) ▲토큰화된 증권 등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며, 이 중 마지막만이 증권법 적용 대상이라고 못 박았다. 핵심 원리는 “경제적 실질이 형식적 명칭에 우선한다(Economic reality trumps labels)”는 것이다. 같은 분산원장 위의 토큰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표상하느냐에 따라 적용 법률을 달리해야 한다는 사고가 이제 미국 증권 규제 당국의 공식 입장이 됐다.유럽연합(EU)의 「MiCA」도 같은 사고방식이다. 흔히 EU의 단일 규제로 알려져 있지만, MiCA는 자산을 ▲전자화폐토큰(EMT) ▲자산준거토큰(ART) ▲기타 암호자산의 세 유형으로 나누어 차등 규율한다. EMT는 신용기관·전자화폐기관만 발행할 수 있고, ART는 별도 인가를 거치며, 기타 암호자산은 백서 발행 등 비교적 완화된 규율을 받는다. 게다가 금융상품에 해당하는 토큰은 아예 MiCA 적용 대상이 아니며, 기존 MiFID II 등으로 별도 규율된다. EU 역시 “디지털자산은 곧 금융상품”이라는 일원적 접근을 명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일본은 더 분명하다. 다카이치 내각은 2026년 4월 가상자산을 결제서비스법에서 금융상품거래법으로 이관하는 안을 의결했다. 가격 변동 수익을 기대하는 투자성 암호자산을 증권법에 준해 규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NFT는 금융 규제에서 제외했고,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서비스법에 잔존시켰다. 일본 금융청은 “NFT의 성격은 다양하므로 일률적으로 금융 규제 대상으로 삼는 데에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송금·결제 목적 자산은 결제서비스법 체제로 규율함이 더 적합하다”고 했다. 같은 디지털자산이라도 사용 목적과 경제적 실질에 따라 적용 법률을 달리한 것이다.요컨대 미국·EU·일본은 모두 같은 결론에 이른다. 디지털자산은 본질에 따라 분류돼야 하고, 분류에 따라 적용 법률과 주관 기관이 달라야 한다. 이것이 글로벌 표준이다. 가장 중요한 누락 — 사권(私權)의 정립여기까지 오면 한국 입법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누락이 드러난다. 디지털자산의 사권(私權), 즉 소유·이전·담보·도산·선의취득 등의 민사법적 정립이다. 이 문제는 자본시장법으로 풀 수 없고, 풀어서도 안 된다. 거래소 인가, 발행 공시, 시세조종 금지 같은 규율을 아무리 촘촘히 짜더라도 디지털자산이 도난·횡령·압류·도산 절차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가 정해지지 않으면 시장 신뢰는 결코 안정되지 않는다.이 영역의 가장 권위 있는 국제 기준은 사법(私法) 통일을 위한 국제기구 UNIDROIT가 2023년 5월 채택한 「디지털자산과 사법(私法)에 관한 원칙」이다. 19개 원칙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디지털자산을 재산권의 객체로 인정하고, 점유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지배(control)’ 개념을 도입했다. 비밀 키 보유자의 배타적 통제력에 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이 원칙 위에서 선의취득, 담보권 설정과 우선순위, 수탁자의 의무, 도산 시 처리 등 사권의 기본 구조가 제시된다. 분명한 점은 이것이 금융 규제법이 아니라 사법(私法) 영역의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자산을 ‘재산권의 객체’로 인정할지는 본래 그 나라 민법의 영역이지, 금융감독기관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UNIDROIT 원칙을 가장 먼저 입법화한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 의회는 2025년 12월 「Property (Digital Assets etc) Act 2025」를 제정하여, 전통적 재산권 분류인 점유물(things in possession)·권리물(things in action)에 더해 디지털자산을 위한 ‘제3의 인격적 재산권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짧은 단일 조문으로 “디지털 또는 전자적 성질의 물건이 점유물도 권리물도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인격적 재산권의 객체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다.이로써 디지털자산 보유자는 도난 시 회복 청구권을 분명히 가지게 되었고, 담보 활용과 도산 처리의 기초도 마련됐다. 주목할 점은 이 입법을 법무부와 법률위원회가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시장이 가장 우려하던 디지털자산의 소유권 문제를, 영국은 금융 규제가 아니라 사법(私法) 개혁으로 풀어냈다.우리 대법원도 이미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비트코인을 “경제적 가치를 지닌 전자적 증표”로 규정하고, 보유자가 “개인 키를 통해 독점적·배타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한다”고 판시한 일련의 판결은 사실상 UNIDROIT의 ‘지배’ 개념을 실무에서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례적 정착이 민법의 명문 규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RWA(실물연계자산) 시대에 등기·물권변동·공시제도와 블록체인 기록의 관계, 디지털자산에 대한 선의취득과 담보 설정의 효력, 강제집행 절차에서의 처리 방식 같은 핵심 쟁점은 여전히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다. 학계에서는 민법상 공시 원칙과 등기제도의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작 법무부의 움직임은 더디다.한국 입법안의 구조적 모순 이제 한국 입법안으로 돌아와 보자. 현재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안과 정부 검토안은 모두 금융위를 단일 주관 부처로 한다. 발행공시·유통공시·인가·거래 지원이 모두 금융위 창구다. 가상자산위원회 회의에 법무부도 참석하지만, 그 역할은 부수적이다. 정작 민법을 주관하는 법무부는 디지털자산의 사권 정립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과제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한다.이 구조에는 두 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입법 관계자 스스로 RWA와 NFT를 법안에서 제외했다는 점이다. “NFT는 자산이라기보다 다양한 목적에 활용된다”, “RWA는 증권법 및 신탁 규제와의 연계성을 고려해 별도 입법으로 보완한다”는 것이 이유다.그렇다면 디지털자산이 곧 금융상품이라는 전제 자체가 흔들린다. 본질에 따른 분리 규율이 필요함을 입법자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정작 법체계는 금융위 일원화로 가는 자기모순이다.둘째, 세부 규제가 글로벌 추세와 정반대로 흐른다는 점이다. 거래소 대주주 지분 15~20% 한도, 은행 51% 컨소시엄 스테이블코인 발행 독점, 무과실 손해배상까지. 미국·EU·일본이 자산 본질에 따른 차등 규율로 향하는 동안, 한국은 일률적이고 강도 높은 금융 규제로 향한다.한 전문가는 이를 “갈라파고스 규제”라 경고하며 “글로벌 경쟁력과 혁신을 제약하는 결과로 귀결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국만이 본질에 어긋난 일원적 규율을 고집한다면 자본은 해외로 이탈하고, 시장은 고립될 것이다. 이미 한국은 미국·EU·일본에 비해 입법의 시기마저 늦다. 늦은 입법이 잘못된 방향이라면 그 비용은 산업 전체와 이용자가 부담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구조가 한 번 굳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본시장법이 만들어진 이후 자본시장의 지형이 그 법의 틀에 맞춰 형성되어 온 것처럼, 디지털자산기본법 역시 한 번 제정되면 향후 수십 년의 시장 구조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무엇이 진정한 ‘기본법’인가「디지털자산기본법」은 이름 그대로 ‘기본법’이어야 한다. 세부 규제법이 아니다. 기본법이 담아야 할 핵심은 세 가지다.첫째, 자산의 본질에 따른 분류와 부처 분담의 명문화다. 토큰증권은 자본시장법으로, 결제 스테이블코인은 별도 결제 법체계로, 그 외 일반 디지털자산은 디지털자산기본법으로, 그리고 RWA는 해당 실물자산 소관 부처(부동산은 국토부·미술품은 문체부 등)가 토큰화 부분도 함께 규율하도록 명시해야 한다. 금융위는 ‘디지털금융자산’을 규율할 뿐, ‘디지털자산 일반’의 주관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디지털자산을 금융 규제로 묶는 발상은 분류부터 잘못된 것이다.둘째, 사권 영역의 입법은 법무부 주도로 민법 체계 안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UNIDROIT 원칙에 따른 ‘지배’ 개념을 수용하고, 선의취득·담보 설정·도산 처리·강제집행 규정을 정비해야 한다. 영국이 한 일을 한국도 해야 한다. 디지털자산 시대의 진정한 인프라는 거래소가 아니라 민법이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RWA 토큰화도, 기관투자자의 본격 진입도, 디지털자산 담보대출 시장의 활성화도 모두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하다.셋째, 입법 과정에 법무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가상자산위원회는 금융위 산하 자문기구일 뿐, 디지털자산 전반의 사권·과세·실물자산 토큰화를 통합 조율할 권한도 역량도 없다. 국무총리실 또는 별도 범부처 협의체에서 영역별 소관을 정리하는 구조가 마땅하다.「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누구인가도, 거래소 지분이 몇 퍼센트인가도 아니다. 이 법이 무엇에 관한 법이며, 누가 무엇을 규율하는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일이다. 그 답을 먼저 찾지 않은 채 세부 규제로 직행하는 것은 음식의 종류를 묻지도 않고 그릇부터 정하는 것과 같다. 기본법이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적어도 음식의 종류부터 정직하게 분류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음식에 어울리는 그릇과, 그 그릇을 책임질 사람을 함께 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본법’이라는 이름의 무게다.구태언 법무법인 린 AI전문그룹 총괄변호사 필자는 디지털자산·AI·핀테크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법률 전문가다. 가상자산 규제, 데이터·플랫폼 법제, 신기술 관련 정책 자문과 입법 논의에 참여해왔으며, 국회·정부 자문 및 학계 토론에도 활발히 관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디지털자산·블록체인 법제를 다룬 전문서와 칼럼 기고가 있으며, 특히 디지털자산의 사권(私權) 정립과 민법 체계 내 재편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구와 발언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6.05.01 10:00

8분 소요
‘18.8% 수익률’...국민연금 성과 뒤에 숨은 환(換)의 그림자 [홍춘욱의 경제프리즘]

전문가 칼럼

‘경제프리즘’은 국내외 거시경제 흐름과 금융시장 변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짚어보는 전문가 칼럼입니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는 풍부한 시장 경험과 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투자와 정책 이슈를 입체적으로 해석해왔습니다. 이 칼럼에서는 복잡한 경제 현안을 쉽게 풀어내고,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통찰과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국민연금의 성과가 놀랍다. 2025년 수익률 18.8%를 기록한 데 이어, 2026년 1월 말 기금 적립금 1500조원의 벽을 돌파했다. 지난 10년 동안 가장 수익률이 높은 연금으로 손꼽히는 캐나다 CPPIB(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 Canada Pension Plan Investment Board)가 7.7%, 세계 2위의 운용 자산을 자랑하는 노르웨이 GPFG(정부연금기금 글로벌, 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가 15.4% 수익에 그쳤음을 감안할 때 국민연금의 성과는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그러나 앞으로도 국민연금이 탁월한 성과를 기록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다면, 한 가지 걱정거리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국민연금의 ‘환(換) 전략’ 변경 문제다.자산 배분의 승리와 ‘환 헤지’ 축소 논란2025년 국민연금 성과의 주역은 단연 국내 주식이었다. 국내 주식의 수익률은 82.4%로 두 번째인 해외주식의 19.7%를 크게 앞선다. 하지만 국내 주식시장이 부진했던 2024년의 15.0% 수익률, 그리고 2023년의 13.6%는 모두 미국 주식 등 다양한 글로벌 자산에 배분한 덕분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최근 국민연금 환헤지 비율을 15%로 상향 조정한다는 소식은 ‘글로벌 자산 배분’의 효과를 떨어뜨릴 위험을 내포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투자자 입장에서 달러 자산은 그 자체로 강력한 ‘내재적 헤지(Natural Hedge·별도의 비용 없이 자연스럽게 위험을 상쇄하는 효과)’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에 대한 전망이 악화되며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 반대로 상승한 달러 자산의 가치가 포트폴리오의 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때문이다.달러 등 해외의 안전자산을 항상 보유하고 있다 보면 2008년 같은 위기를 맞을 때에도 안정적인 성과를 기록할 수 있다. 2008년 KOSPI 지수가 40.7% 하락했음에도 국민연금은 0.02%의 수익을 올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비싸진 안전자산을 일정 부분 팔아서 값싸진 국내 위험자산을 살 기회가 되기도 하니 일석삼조나 마찬가지다.하지만 국민연금의 환헤지 강화 움직임은 이러한 천연의 방어막을 스스로 걷어내는 행위와 다름없다. 보이지 않는 비용…수익률 갉아먹는 환헤지환헤지 비율을 높이는 데 따르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환 헤지 비용(환율 변동 위험을 줄이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지불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벌어지며 환헤지 비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4월 17일 기준, 1년 만기 한국 국채 금리가 2.92%이고 미국이 3.67%이기에 한미 금리차는 0.75%포인트에 이른다. 여기에 각종 거래비용까지 감안하면 환헤지에 따르는 손실은 더 커질 수 있다.국민연금이 고성과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문학적인 헤지 비용이 발생하는 셈이다. 장기 투자자인 연기금이 단기적인 환율 변동성에 매몰되어 구조적인 비용 지출을 감수하는 것이 과연 기금의 장기 수익률에 긍정적일지도 의문이다.환율 변화는 단순히 제거해야 할 소음이 아니라 안정적인 자산 배분을 위한 핵심 변수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로 생각된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책임지는 핵심 기관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을 너무 단기적인 시각에서 처리하려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026.04.30 06:30

3분 소요
피지컬AI의 민주화…韓 제조업 혁신 이끈다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피지컬 AI(Physical AI)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피지컬 AI란 OpenAI의 챗GPT(ChatGPT)나 구글의 제미나이(Gemini)가 언어 세계에서 범용적인 지능을 보여주듯, AI가 로봇이나 자동차와 같은 물리적 시스템과 결합하여 실제 세계의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는 비전을 의미한다.2025년 CES 기조연설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피지컬 AI를 “AI의 다음 프론티어”라고 선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피지컬 AI를 현실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국 정부는 피지컬 AI 발전을 위한 국책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고, 상장된 로봇 기업들의 주가는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로봇 분야를 연구해온 경험에 비춰볼 때, 이만큼의 자본과 관심이 동시에 집중된 적은 없었다.이러한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한국은 피지컬 AI 시대의 주요 수혜국으로 주목받고 있다. 피지컬 AI가 가져올 자동화는 최근 많은 한국 기업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제조업 인력난을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닌, 구조적 경쟁력의 문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핵심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Physical AI와 로봇의 시대국내 제조업은 지속적인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해 왔다. 그러나 인건비 상승이 이제는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면서 단순히 생산기지를 옮기는 전략 역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한편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을 추진하고 있지만, 높은 인건비를 고려하면 공장을 미국으로 되돌리는 것 역시 쉬운 선택은 아니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동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가 되었다. 이제는 ‘어디로 옮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산하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자동화의 높은 수요 속에서 피지컬 AI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이 흐름에 맞춰 국내 주요 대기업과 정부 역시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인공지능 혁신(AX·AI Transformation)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필자는 미국에서 로봇과 AI 기술을 연구한 이후 창업하여, 실제 제조 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 기술들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제조업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피지컬 AI가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구조적 한계들도 짚어보려 한다.제조업 자동화가 어려운 페인 포인트(Pain Point)제조업에서 오랫동안 자동화되지 못한 공정들은 왜 지금까지도 사람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본 결과, 자동화의 어려움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었다.첫째, 기존 자동화 방식은 제품과 환경의 비정형성에 극도로 취약하다. 대부분의 자동화 설비는 미리 정의된 동작만을 수행하는 ‘개방 루프’(Open-loop, 미리 설정된 입력값에 따라 작동하는 제어 방식)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제조 현장에는 정해진 모션만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작업이 훨씬 많다. 필름이나 케이블처럼 형태가 쉽게 변하는 유연한 물체를 다루는 공정이 대표적이다. 한 배터리 제조사의 경우, 셀 두께가 0.1mm만 달라지거나 보호 필름에 미세한 변형만 일어나도 기존 설비가 대응하지 못해 라인이 멈추곤 했다. 숙련된 작업자는 경험을 통해 축적된 물리적 ‘커먼센스’(Common sense)를 바탕으로 이러한 변화를 즉각 판단하고 보정하지만, 기존 자동화 설비로는 이러한 대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둘째, 제조 공정과 생산 환경의 높은 다양성이다. 특정 제품을 장기간 대량 생산하는 경우에는 자동화 설비의 경제성이 확보된다. 하지만 위탁생산(EMS) 업체나 소비자 전자 산업처럼 수요에 따라 모델이 수시로 바뀌는 환경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제품이 바뀔 때마다 설비를 재구성하고 로봇 모션을 다시 학습시켜야 하므로, 이러한 다품종 소량생산 환경에서 기존 자동화 방식은 구조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셋째, 자동화는 제조 기업 입장에서 기술이 아닌 투자의 문제다. ▲수율 ▲작업 속도 ▲총비용이라는 세 요소가 동시에 충족되어 노동자의 인건비 대비 투자수익률(ROI)이 확보되어야 한다. 대기업과 진행하는 시범 양산 프로젝트들이 기술적으로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 문턱을 넘지 못해 실제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사례가 매우 많다. 피지컬 AI, 전문가의 암묵지 실행 가능하게 만들어기존의 제조업 자동화는 오랫동안 규칙 기반(Rule-based) 방식에 의존해 왔다. 로봇의 동작 궤적을 사람이 사전에 모두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예외 상황이 빈번하고 생산 대상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현장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규칙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피지컬 AI는 이를 데이터 기반 접근으로 전환한다. 주어진 센서 입력과 환경 속에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를 규칙으로 작성하는 대신, 데이터로부터 스스로 학습하게 만드는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숙련 작업자가 “필름이 구겨졌을 때 어떻게 펴는지”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 동작을 직접 보여줄 수는 있다. 엔지니어가 모든 예외 상황을 코드로 짤 수는 없어도, 그 상황들을 데이터로 수집할 수는 있다. 피지컬 AI는 바로 이 암묵지(Tacit Knowledge)를 명시적인 자동화로 전환하는 도구가 된다.충분한 데이터와 컴퓨팅 자원이 갖춰질 때, 데이터 기반 접근은 규칙 기반 방식보다 훨씬 높은 성능과 유연함을 보여준다. 로봇은 비정형 물체나 미세한 위치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고, 환경이 바뀌더라도 현장 데이터를 보강하여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이는 로봇 설정에 필요한 인력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더 나아가 데이터가 대규모로 축적된다면, AI는 경험하지 못한 명령이 주어지더라도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유추하여 작업을 수행하거나 실수를 스스로 복구할 가능성까지 열어준다. 전 세계가 이를 ‘로봇의 챗GPT 순간’이라 부르며 기대하는 이유다.피지컬 AI의 불편한 스케일링그러나 이러한 파급력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바로 충분한 데이터의 축적이다. 많은 기업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이터 팩토리’라는 산업까지 등장했지만, 범용 지능을 위해 얼마나 많은 데이터와 비용이 필요한지는 여전히 미지수다.더 근본적인 문제는 데이터의 양보다 ‘성격’이다. 자동화 대상과 범위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으는 데이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피지컬 AI는 필연적으로 물리적 플랫폼에 종속된다. 제조업은 공정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에 공장마다 장비 구성이 제각각이다. 하나의 통일된 플랫폼 위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지능을 배포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이 맥락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이 해법으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제조업에서는 오히려 비효율적인 경우가 많다. 공정마다 요구되는 도구와 로봇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거운 유리판을 옮길 때는 공압식 패드가, 특정 공정에서는 특수 조명과 현미경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수십 년간 축적된 공학적 최적화의 결과물이다. 피지컬 AI를 도입한다고 해서 이러한 기술적 선택들을 단일 플랫폼으로 쉽게 대체할 수는 없다. 결국 제조업에서의 피지컬 AI는 단일한 범용 해답이 아니라, 복잡한 물리적 현실 위에 ‘어떤 지능을 어디에 얹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선택의 문제다. 한국 제조업 피지컬 AI에서 기회 찾아야제조업에서 피지컬 AI를 현실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선해야 할 전략은 다음과 같다.첫째, 당분간은 데이터의 부재를 전제로 전략을 세워야 한다. 단기간의 대규모 범용 데이터 확보를 기대하기보다, 적은 데이터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특정 공정부터 집중해야 한다. 소규모 공정들을 하나씩 자동화해 나가는 접근이 ‘완성된 범용 지능’을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둘째, 제조업의 다양성을 장애물이 아닌 본질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공정과 장비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다양성 위에서 피지컬 AI를 발전시켜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결합해 하드웨어에 종속되지 않는 기반 모델(Foundation Model)을 구축하되, 그 출발점은 개별 공정에 최적화된 적용이어야 한다.다행히 한국 제조업은 수십 년간 성숙한 자동화 생태계를 구축해 왔다. 대기업의 자동화 조직, 수백 개의 SI(System Integration) 업체, 특화 장비 제조사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아직 피지컬 AI가 학계의 전유물에 머물러 있지만, 이를 소규모 데이터로도 활용 가능한 도구로 만들어 기존 생태계가 빠르게 흡수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다양성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중견 SI 업체가 적은 데이터로도 유연 물체 핸들링 솔루션을 만들 수 있다면 고난도 자동화를 중소 고객사에도 제공할 수 있다. 대기업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몇 주씩 걸리던 로봇 재설정을 며칠 내로 단축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경쟁력이다.결국 한국 제조업은 ‘피지컬 AI의 민주화’를 통해 기존 생태계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 한국의 탄탄한 제조업 현장 전문가들이 피지컬 AI를 도구로서 쉽게 다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인공지능 전환(AX)가 시작될 것이다. 필자는 미국 칼텍(Caltech) 학사, MIT CSAIL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봇과 AI 분야에서 ICML Outstanding Paper, T-RO Best Paper Finalist 등을 수상하며 연구 성과를 인정받았다. NASA JPL, 도요타 연구소(TRI), 보스턴 다이내믹스 AI 인스티튜트(Boston Dynamics AI Institute) 등 유수의 기관과 협업했다. 현재 제조업 자동화 피지컬 AI 기업인 ‘카본식스’를 공동 창업하여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고 있다.

2026.04.29 14:07

6분 소요
수능 체계 과도기 시점에 달라지는 선호도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7학년도는 현행 통합 수능 체제 아래에서 치러지는 마지막 수능이다. 2028학년도부터 수능 체계가 전면 개편되는 만큼, 사실상 올해 고3 학생들은 현 제도의 마지막 수험생인 셈이다. 이런 과도기적 시점에서 개편 직전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의 과목 선택 양상에는 예년과는 다른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더 뚜렷해진 사탐런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변화는 이른바 ‘사탐런’(사회탐구 쏠림) 현상이다. 자연계 학과들이 수시와 정시에서 사회탐구 반영을 허용하기 시작한 데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이런 허용은 2026학년도부터 전면적으로 확대됐다. 제도 변화가 본격화하자 수험생들의 선택도 빠르게 움직였다. 2027학년도 고3 학생들이 치른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사회탐구 응시 비율은 75.9%, 과학탐구 응시 비율은 24.1%로 나타났다. 단순히 수치만 놓고 봐도 올해 고3 수험생 10명 가운데 거의 8명이 사회탐구를 택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몇 년의 흐름을 함께 놓고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지난해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는 사회탐구가 64.6%, 과학탐구가 35.4%였다. 2025학년도에는 사회탐구 55.1%, 과학탐구 44.9%였다. 상위권 대학이 자연계 학과 지원 때 사회탐구를 허용하지 않았던 2024학년도에는 사회탐구 52.8%, 과학탐구 47.2%로 두 영역의 비중 차이가 크지 않았다.그러나 자연계 지원 과정에서 사회탐구 허용 폭이 넓어지자, 사회탐구 선택 비율은 해마다 가파르게 상승했다. 반대로 과학탐구 비율은 빠르게 낮아지는 흐름을 보인다. 결국 제도 변화가 수험생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수학 과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확인된다. 통상 문과 수학으로 분류되는 확률과 통계 선택 비율이 올해 고3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번 시험에서 확률과 통계를 선택한 비율은 68.4%였고 미적분은 29.4%, 기하는 2.1%였다. 흔히 이과 수학으로 분류되는 미적분과 기하의 선택 비율을 합치면 31.6%다.이를 그대로 해석하면 2027학년도 고3 수험생의 수학 선택 구도는 문과 과목 68.4%, 이과 과목 31.6%로 정리된다. 다시 말해 수험생 10명 중 7명가량이 수학에서 문과 계열 과목을 택하고 있는 구조다. 이 역시 자연계 학과들이 2026학년도부터 문과 수학인 확률과 통계를 본격적으로 허용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예전 같으면 자연계 학과 진학을 염두에 둔 학생들이 미적분이나 기하를 사실상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확률과 통계를 택해도 지원이 가능한 대학과 학과가 늘어났다. 그 결과 수험생으로서는 이전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그 선택이 실제 응시 비율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다만 수학 과목에서 나타난 변화를 두고 이과 학생들이 수험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확률과 통계로 일제히 이동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연계 학과가 문과 수학인 확률과 통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2024학년도에도 확률과 통계 선택 비율은 53.9%였고, 미적분과 기하 비율은 46.1%였다.게다가 이과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에는 단순히 부담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과목을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 같은 원점수를 받더라도 표준점수 측면에서는 확률과 통계보다 미적분이나 기하가 더 유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입시 전략을 세우는 상위권 수험생일수록 단순 난이도보다 표준점수 구조와 대학별 반영 방식까지 함께 고려할 가능성이 크다. 인문계 늘고·자연계 줄고국어 과목에서는 또 다른 특이 동향이 나타난다. 국어는 언어와 매체, 화법과 작문으로 나뉘지만, 과목 성격상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뚜렷한 영역은 아니다. 수학이나 탐구처럼 특정 계열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거나 불리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대학들 역시 문·이과 학과별로 국어에서 언어와 매체 또는 화법과 작문을 별도로 지정해 놓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국어 선택 과목의 변화는 단순한 대학 반영 방식보다는 수험생들의 체감 난이도와 선호, 학습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여지가 있다.실제 2027학년도 고3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는 언어와 매체를 선택한 학생이 25.2%, 화법과 작문을 선택한 학생이 74.8%로 나타났다. 화법과 작문 선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셈이다. 이 흐름을 연도별로 이어서 보면 변화는 더 또렷해진다. 화법과 작문 선택 비율은 통합 수능이 도입된 2022학년도 73.6%에서 2023학년도 65.3%, 2024학년도 62.4%, 2025학년도 62.6%로 한동안 낮아졌다. 그러나 이후 2026학년도 66.2%로 반등했고, 2027학년도에는 74.8%까지 올라섰다. 줄어들던 비율이 최근 2년 사이 다시 뚜렷하게 상승한 것이다.일반적으로 수험생들은 문항 구성과 과목 특성상 언어와 매체를 화법과 작문보다 더 부담스럽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인식은 선택 비율에도 일정 부분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사회탐구 응시 수험생 가운데 지난해 수능에서 화법과 작문을 선택한 비율이 77.0%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화법과 작문이 문과 학생들이 주로 선택하는 과목으로 분류될 수 있다.특히 화법과 작문 선택 비율은 2023학년도부터 줄어들다가 최근 2년 사이 다시 빠르게 늘어나는 흐름을 보인다. 이 점은 최근 입시 전반에서 나타난 변화와 일정 부분 겹쳐 보이는 면도 있다. 예컨대 의대 선호나 취업 등의 이유로 이과 선호가 강해졌던 흐름과 유사한 패턴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2026학년도 주요 10개 대학 수시 지원에서 인문계 지원자는 1만5450명으로 8.2% 증가했지만, 자연계 지원자는 6705명으로 3.2% 줄었다. 물론 정시는 군별 이동 등의 변수가 존재해 정확한 비교가 쉽지 않다. 하지만 수시는 정시보다 문·이과 교차지원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한 지표가 된다.

2026.04.27 06:00

4분 소요
‘하닉고시’ 열풍과 삼성 노사의 성과급 갈등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하닉고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SK하이닉스가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핫합니다. SK하이닉스가 올해 생산직 공개 채용을 시작하자 학원가에서 ‘단기합격반’을 개설하는가 하면 온라인 서점에선 관련 교재가 실시간 판매 1위에 올랐습니다. 일부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취준생은 지원자의 최종 학력을 고등학교 또는 전문대학 졸업자로 제한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학력을 낮춰서 지원해도 되는지 문의한다고 합니다. 대학원생 중에서도 석·박사를 포기하고 ‘하닉고시’ 열풍에 합류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SK하이닉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데는 활황인 반도체 시장에 대한 기대와 함께 엄청난 성과급을 꼽을 수 있습니다. SK하이닉스 노사는 2021년 성과급 갈등을 겪은 이후 작년 9월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쓰고 개인의 성과급 상한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이에 사상 최대 실적을 낸 작년에는 1억원 안팎의 성과급이 지급됐고, 영업이익이 25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는 직원 3만4500명이 평균 7억원 넘게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임원도 아닌 평직원이 억대 성과급을 받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요, SK하이닉스에서는 현실이 됐습니다. 직장인 중에 부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중에서도 특히 부러워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삼성전자 노조입니다. 삼성전자도 SK하이닉스처럼 역대급 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755% 증가한 57조2000억원이며 연간 영업이익은 300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삼성 노조는 세계적인 실적에 걸맞은 보상을 해달라며 반도체 성과급 재원으로 영업이익의 15%를 요구하고 나섰는데, 작년 삼성전자가 연구개발비에 투자한 37조7000억원보다도 많은 45조원 가량입니다. 노조는 사측이 수용하지 않으면 5월 21일부터 파업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파업할 경우 반도체 라인 가동 중단 등으로 20조~30조원 규모의 손실이 날 수 있다는 압박도 잊지 않았습니다.회사가 이익이 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좋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AI와 반도체 등 최첨단 기술 산업계에서 인재 확보전이 치열한 만큼 기업들도 보상 체계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늘 업황이 좋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로 잘 나가고 있지만 미래 전망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AI 붐으로 HBM 등 메모리 분야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전체 반도체 시장의 약 70%를 차지하는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와 파운드리 분야에서의 성장은 여전히 미미합니다. 일부 전문가는 “한국이 AI 시대에 메모리 반도체 수출에만 의존해서는 대만 하청업체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성과급 갈등을 단순한 분배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노조가 요구하는 대규모 성과급은 단기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 여력을 잠식할 수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과를 공유하되, 미래 투자와 충돌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의 성장도, 노조의 성과급도 지속 가능할 것인데요, 삼성 노사가 이 길을 가기 위해 갈등이 아닌 논의의 장에서 만나길 기대합니다.

2026.04.26 06:00

2분 소요
에너지를 연금으로...중소도시들의 도전과 과제[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집값 상승이 서울 유권자의 가장 뜨거운 분노라면, 행정통합이 지방 광역시 및 대도시들의 기회요인이라면 집값이 오르기는 커녕, 공시가격 이하로도 부동산 거래가 어려운 도시.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도시들의 이번 선거 이슈는 무엇일까. 이들 도시의 선거 풍경은 서울이나 대도시와는 결이 다르다. 집값 심판도 재건축 기대도 아닌, 근원적인 생존의 질문이 투표를 하는 사람, 투표로 선택을 받는 사람 모두에게 무겁게 깔려 있다. 특히 최근 각 정당의 경선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지방의 미래를 바꿀뻔한 혁신적인 시도들이 정치적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초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철새 공장 시대에서 ‘유실수 에너지’ 시대로그동안 지방 중소도시들이 인구와 기업을 붙잡는 방식은 단순했다. 산업단지를 조성해 공장을 유치하고 공공기관 이전을 유치하며, 축제와 관광으로 외부인을 끌어들이는 것이 거의 유일한 경로였다. 여기에 전입 지원금, 청년 정착금 같은 현금성 지원을 더하는 방식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 기초 지자체 10곳 중 7곳 이상이 재정자립도 30%의 벽을 넘지 못하고 비수도권 지자체의 80%가 소멸의 공포를 실감하는 현실에서 이 전략은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다. 지금까지의 기업 유치는 언제든 조건이 나빠지면 떠날 준비를 하는 ‘철새’를 잠시 머물게 하려는 처절한 노력에 가까웠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지역의 햇빛과 바람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유실수’를 심는 작업이다. 에너지 설비는 한 번 입지하면 20~30년 단위로 그 자리를 지키며 매년 수익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를 주민이 지분 구조나 연금 형태로 함께 나누는 구조, 그것이 바로 ‘에너지 연금’의 본질이다.이런 배경에서 몇몇 도시들은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공약들이 등장하고 있다. ▲햇빛수당 ▲블루연금 ▲시민 햇빛연금이라는 이름을 단, 에너지 시설의 발전 수익을 주민에게 연금이나 배당 형태로 돌려주겠다는 구상들이다. 군산에서는 새만금 일대 영농형 태양광으로 수천억원대 재원을 마련해 가구당 최대 5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이 나왔고, 익산에서는 유휴부지 1000만㎡에 태양광단지를 조성해 가구당 월 10만~30만 원씩 정기 지급하는 한편, 마을 단위로는 월 500만원을 마을기금으로 배당해 공동체 자산으로 순환시키겠다는 구상이 등장했으며 영덕에서는 육·해상 풍력단지 1.5GW를 통해 연간 798억원의 수익을 확보하고 군민 1인당 연 240만원, 4인 가족 기준 960만원을 연금처럼 나누겠다는 청사진이 제시됐다. 세 도시, 세 가지 구상. 이름도 재원 구조도 지급 방식도 다르지만, 이 공약들이 공유하는 논리는 분명하다. ‘기업 유치로 일자리를 늘리는 전략’에서 ‘에너지 설비 자체를 지역 자산으로 삼아 그 수익을 주민 소득으로 전환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세금을 쓰는 게 아니라 지역이 만들어낸 가치를 지역민에게 되돌리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발상의 전환 자체는 분명히 신선했다. 그러나 이 공약들을 내세웠던 전·현직 단체장과 예비후보들은 각 정당의 경선 과정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그렇다고 이 흐름을 의미 없는 일탈로 치부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지역, 서로 다른 경력의 예비후보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구조의 공약을 독립적으로 꺼내 들었다는 사실은, 지방 정치의 상상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에너지 배당과 주민 공유모델 세계 곳곳에서 시도에너지 배당과 주민 공유 모델을 처음 실험한 곳들은 화려한 대도시가 아니라 쇠퇴하는 주변부 지역이었다. 영국의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의 해안·농촌 지역에서는 발전 사업자가 ‘커뮤니티 베네핏 펀드’를 운영하는 것이 제도적 기준으로 확립돼 있다. 영국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30MW 규모 풍력단지는 25년 운영 기간 동안 총 375만 파운드에 달하는 지역기금을 조성해야 하며, 이 기금은 마을 단열 공사, 저소득층 에너지 비용 지원, 청년 장학금 등으로 주민의 실질적인 삶에 직접 쓰인다. 스코틀랜드의 CARES라는 제도는,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를 겪는 섬과 농촌 지역의 커뮤니티 그룹이 직접 풍력·태양광 프로젝트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보조금과 저리 대출을 결합한 방식으로 초기 투자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원한다. 에너지 생산에서 얻은 수익은 마을기금으로 적립돼 지역 서비스와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쓰인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미델그룬덴 해상풍력단지는 약 8500명의 시민이 지분 절반을 협동조합 형태로 소유하면서 설립 이후 평균 6~7%의 배당을 받아왔다. 독일도 수천개의 에너지 협동조합이 태양광·풍력 설비를 공동 소유하며 발전 수익을 주민 배당으로 나누는 방식이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다.이들 사례가 공유하는 교훈은 하나다. 에너지 시설이 ‘우리 마을의 자산’이 될 때, 주민은 반대자가 아닌 이해당사자가 되고 수익은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안에서 돌게 된다. 한국의 에너지 연금 구상은 이런 해외 사례와 비교해 아직 초기 아이디어에 가깝다. 그러나 ‘경쟁력이 약해진 변방 지역이 에너지 설비를 유치해 그 수익을 주민과 나누겠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다르지 않다.사람은 떠나도 정책 설계도는 남아야 한다서울에서는 집값과 월세가, 광역 도시에서는 통합과 자립의 선택이 도시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지방 중소도시에게는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에너지 연금 공약을 내걸었던 후보들이 비록 본선 무대에 서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남긴 숫자와 설계도까지 폐기돼서는 안 된다. 어떤 정책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경선에서 탈락한 것은 후보들이지, 그들이 제안한 정책 모델의 타당성이 아니다. 비록 한국 정치에서는 사람이 바뀌면 정책도 함께 뒤집히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소멸의 벼랑 끝에 선 도시들에게는 이 설계도를 계승하는 것이 오히려 생존법일지 모른다.

2026.04.25 10:00

4분 소요
이란 전쟁 이후…아세안, 글로벌 제조 심장으로 부상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2026년 현재, 이란 전쟁이 촉발한 긴장은 전 세계를 명확한 진영 논리 대신 경제적 실리와 공급망 안보를 중심으로 유연하게 결합하는 ‘소프트 블록’(Soft Bloc)의 시대로 급격히 밀어 넣고 있다. 이 거대한 지정학적 파고 속에서 아세안(ASEAN)은 단순한 대안 시장을 넘어, 에너지 주권 강화와 첨단 제조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글로벌 산업의 심장부'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크며, 투자 지형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다.2026년 현재 목격되는 글로벌 블록화의 특징은 과거 냉전 시대와는 판이하다. 과거의 ‘하드 블록’(Hard Bloc)이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결속과 군사 동맹을 바탕으로 했다면, 현재의 소프트 블록은 경제적 이익과 공급망 안보를 중심으로 형성된 보다 유연하고 다층적인 구조를 띤다. 이러한 소프트 블록은 회원국 간의 경계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국가들이 필요에 따라 여러 블록에 중첩되어 활동하는 거래적 성격을 지닌다.유연하게 뭉치는 소프트 블록 개막아세안도 전쟁이 진정된 이후 역내 공급망 재편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석유화학 쪽에서도 인도네시아는 그레식 특별경제구역에 멜라민 공장을 건설하며 수직 계열화를 추진 중이고, 브루나이와 캄보디아 역시 대규모 정유 및 석유화학 단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등 석유화학 생산기지를 역내에 두려는 노력을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제조시설도 적극적으로 유치할 것이다. 특히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 등으로 미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려 했던 EU, 중국 등은 새로운 생산기지를 모색할 것이며, 아세안이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아세안 국가들 입장에서도 점점 잊혀 가던 코로나 19 상황에서 이번 전쟁으로 공급망 위기가 다시 부각되었다. 약한 제조업 기반에서 원재료는 수출하고 있으나 가공품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체제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박찰 것이다. 아세안에서 제조업이 성장하는데 있어 한가지 큰 걸림돌은 숙련된 노동자의 부족이다. 급격한 수요 증가를 인재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능력 격차(Capability Gap) 현상이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엔지니어링과 AI 분야의 숙련 노동자 부족으로 인해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이직률은 17~20%에 달하며 기업의 제조 원가 상승을 초래하고 있다. ASEAN 주요 6개국인 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베트남에서 올해 숙련 기술자 부족 규모는 약 660만 명으로 추정된다. ‘사람 귀해진 아세안’…660만 인재 부족, 자동화 열풍 불러와 노동력 부족과 비용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아세안 제조업체들은 공장 자동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PwC의 연구에 따르면 아세안 국가 일자리의 34%가 자동화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로봇 도입의 강력한 동기가 되고 있다. 2026년의 자동화 트렌드는 단순히 사람을 대체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기계의 협업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로봇 가격의 하락은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조차 자동화 대열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특히 로봇을 소유하지 않고 구독 형태로 사용하는 'RaaS(Robotics-as-a-Service)' 모델의 부상은 아세안 전역에서 로봇 설치 대수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기폭제가 되었다.2026년은 대리인적 AI(Agent AI)가 제조업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 원년이 될 것이다. 과거의 AI가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그쳤다면, 대리인적 AI는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계획을 수립하고 시스템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업을 실행한다.아세안의 스마트 팩토리들은 이러한 에이전트 기반 시스템을 통해 숙련된 작업자의 판단 기능을 자동화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물류 허브에서는 AI 에이전트가 구조화되지 않은 무역 데이터를 분석하여 최적의 경로를 설정하고, 운영 비용을 30% 이상 절감하고 있다. 베트남의 금융 서비스 분야에서도 에이전트 기반 AI를 도입하여 처리 시간을 90% 단축하고 인건비를 33% 절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기술적 도약은 아세안이 단순 생산 기지를 넘어 고부가가치 기술 허브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이란 전쟁 이후의 글로벌 질서 재편은 한국 경제에 위기인 동시에 거대한 기회다. 국내에서는 차세대 소재와 대리인적 AI 소프트웨어 등 원천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아세안의 고질적인 숙련 노동자 부족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한국형 스마트 팩토리 솔루션(AI 에이전트 + 협동 로봇 패키지)을 패키지화하여 수출해야 한다. 아세안의 인재 기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기술력을 활용한 소프트 파워를 강화해야 한다. 정부 지원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현지 노동자들에게 한국형 자동화 설비 운용 능력을 교육시켜야 한다. 이는 한국 기업의 현지 적응력을 높이는 동시에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아세안의 자원과 한국의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전략적 이원화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을 결정지을 생존 전략이 될 것이다. 필자는 삼정 KPMG∙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한국벤처투자 등 23년이상 다양한 사업경험과 더불어 벤처캐피탈∙회계법인∙인프라∙스타트업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재 싱가포르의 Hanbridge의 대표로 한국 중소∙벤처기업의 해외 진출 및 해외 자금 유치를 돕는 역할과 함께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생태계를 연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26.04.25 10:00

4분 소요
AI가 불붙인 ‘전력 전쟁’, 한국의 좌표는?[에너지 전쟁, 중동 쇼크 그 이후]⑤

산업 일반

인공지능(AI) 패권의 무게중심이 반도체에서 전력으로 옮겨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4년 약 415테라와트시(TWh)였던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늘어난다. 일본 한 해 전력 소비에 맞먹는 규모다. 데이터센터 전력 가운데 AI 몫은 현재 5~15%에서 2030년 35~50%로 뛴다. 전통 데이터센터가 10~25메가와트(MW)였다면 하이퍼스케일 AI 팜은 단일 사이트당 100MW를 넘는다. 기업의 AI 경쟁력은 파라미터 수가 아니라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값싸게 확보하느냐에서 갈린다. 모델 성능을 끌어올리는 한 단위의 추가 학습이 수십 MW의 추가 계약 전력을 요구한다.각국은 입법에서 먼저 움직였다. 미국 하원은 2025년 12월 AI 인프라 인허가 간소화 법안(SPEED Act)을 통과시켰다. 상원에서는 톰 코튼 의원의 ‘DATA Act 2026’이 AI 데이터센터에 연방 전력 규제를 우회한 오프그리드 자체 조달 경로를 제시한다. 반대편에서는 호울리·블루멘털 의원의 ‘GRID Act’가 데이터센터 비용이 가정 전기요금으로 전가되지 않도록 차단한다. 더빈 의원의 ‘Data Center Water and Energy Transparency Act’(2026-03-25 발의)는 에너지·용수 소비 공시를 의무화한다. 유럽연합(EU)는 한층 엄격하다. AI법으로 범용 AI 모델의 에너지 소비 문서화를 의무화했고 개정 에너지효율지침(EED)과 위임규정 2024/1364로 데이터센터 공통 등급제와 연례 보고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2026년 2분기에는 데이터센터 최소 성능 기준 패키지 채택이 예고돼 있다. 입법 방향은 나뉜다. 미국은 속도와 예외를, EU는 공시와 표준을 앞세운다. 그 중간 어디에도 한국 기업은 진출 조건을 맞춰야 한다.한국의 이중 입법, 그 허술한 연결한국은 두 갈래의 제도 움직임이 겹친다. 하나는 지난 4월 6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국무회의에 보고한 ‘에너지 대전환 추진계획’이다. ▲2030년 재생에너지 100기가와트(GW)·발전비중 20% 이상 ▲2040년 석탄발전 60기 단계적 폐지 ▲수소환원제철 상용화 ▲분산·양방향 전력망 ▲지역별·시간대별 요금제 ▲HVDC 융통선로 구축이 골자다. 다른 하나는 22대 국회에 계류돼 있던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관련 법률안 6건이 4월 14일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일괄 ‘대안반영폐기’돼 통합 대안으로 수렴한 흐름이다. 공급(에너지)과 수요(데이터센터) 양쪽에서 입법이 맞물리는 드문 국면이다. 다만 두 제도를 잇는 연결부가 허술하면 어느 쪽도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재생 대전환이 공급을 늘려도 수요 측 AI 팜이 수도권에 쏠리면 송배전과 요금 체계가 먼저 무너진다. 통합 대안의 세부 조문이 분산 입지와 어떻게 접속하느냐가 남은 쟁점이다.정부가 보강할 정책은 크게 다섯 갈래다. 먼저 재생·원전·SMR을 아우르는 포트폴리오 공급이 필요하다. 재생 100GW 목표는 유지하되, 24시간 고부하가 특징인 AI 팜에는 무탄소 기저전원(CFE) 요건을 충족하는 SMR과 대형 원전이 병행돼야 한다. 다음은 송배전 병목 해소다. 국가 기간전력망 특별법과 서해안 HVDC 융통선로를 조기 가동하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공급 모델을 표준화해 AI 팜 단지에 적용해야 한다. 전력·용수·부지를 묶은 통합 입지제도 미뤄서는 안 된다. 미국이 연방 토지를 풀고 EU가 등급제로 묶는 이유는 같다. 전력·냉각수·통신이 한 묶음일 때 단지 단위 투자가 성립한다. 요금 설계도 더 정교해져야 한다. 지역별·시간대별 요금제는 방향이 옳다. 대규모 수요자에게는 장기고정 전력구매계약(PPA) 우선순위를 부여해 자본비용을 낮춰야 한다. 마지막은 국제 정합성이다. EU 데이터센터 등급제와 AI법 공시 의무, 미국 더빈 법안에 맞춰 한국도 에너지·용수 보고 체계를 선제적으로 표준화해야 수출과 글로벌 로케이션 경쟁에서 불이익을 피한다. 지표와 측정 방법을 EU 위임규정 수준으로 먼저 맞춰두는 것이 사후 대응보다 싸게 먹힌다.기업이 다시 짜야 할 전략기업의 전략은 한층 날카로워져야 한다. 전력은 이제 재무 리스크다. 장기 PPA와 RE100 조달을 비용이 아닌 헤지 수단으로 내재화하고, 원전 인접지와 재생 풍부 지역으로 입지 포트폴리오를 분산할 필요가 있다. 전력 내재화도 선택지에 들어온다. 자체 SMR 파트너십, 연료전지·가스 하이브리드, 대용량 ESS를 결합한 마이크로그리드는 오프그리드 법제화 흐름과 맞물려 가치가 커진다. 입지 다변화도 과제다. 수도권 전력 여유가 고갈되는 가운데 북유럽·중동·동남아의 저렴하고 청정한 전력 허브와 국내 거점을 이중화해 지정학·전력 리스크를 동시에 분산해야 한다. AI 자체의 에너지 효율도 경쟁력이다. 모델 경량화, 액침 냉각, 폐열 재활용, 전력사용효율(PUE) 1.2 이하 설계는 진입 조건이 되어간다. 공시 대응은 마지막 과제다. EU 등급제와 미국 공시 법안, 국내 ESG 공시가 수렴하는 만큼, 에너지·용수 데이터 관리 체계를 갖춘 기업이 2~3년 뒤 자본조달과 글로벌 고객 계약에서 앞선다. 공시 대응은 IR 문구가 아니라 설비 투자 의사결정의 출발점이다. 보고 체계가 없는 기업은 EU 계약 입찰 테이블에 앉지 못한다.‘AI 전력 전쟁’은 반도체 전쟁의 후속편이 아니다.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새로운 병목을 둘러싼 각축이다. 전력을 자국 내에 안정적으로 묶어둔 나라가 AI 기업의 투자처를 결정하고, 그 결정이 데이터·모델·응용 서비스까지 연쇄적으로 끌어당긴다. 재생 대전환과 AI 특별법이라는 두 제도를 ‘전력 중심 산업정책’으로 엮어낼 때, 한국은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선발주자 프리미엄으로 되돌릴 기회를 얻는다. 공급·입지·요금·공시, 네 축을 같은 설계도 위에 올려야 한다. 이 시점을 놓치면, 제조업 공동화를 넘어 ‘AI 공동화’가 다음 과제로 남는다.

2026.04.20 11:00

4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