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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학년도 ‘황금 돼지띠’ 수험생들이 겪어온 변화들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금년도 고3 학생들은 지난해보다 약 4만7000명 늘어났다. 2007년 황금돼지띠 해에 태어난 수험생들이다. 2026학년도 대입 수험생들로, 현재도 의대 모집정원 조정 등 입시 변수와 수험 준비에 집중해야 하는 시점에 조기 대선까지 경험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상 처음으로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일정까지 조정됐으며, 하필 조정된 날짜가 6월 3일 대선 다음 날인 6월 4일이다.변화의 연속 2007년 황금 돼지띠이 학생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2014년에는 학생부종합전형이 도입됐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앞으로의 대학입시는 ‘학교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교내외 다양한 활동, 수행평가, 회장·부회장 이력 등 여러 스펙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시 정책의 변화 시점이었다.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016년에는 수능에서 한국사가 절대평가로 바뀌었다. 당시 수능에서 사회 선택과목 중 한국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매우 적어 교육적 문제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한국사는 절대평가와 동시에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다. 수능에서 한국사 과목은 쉽게 출제된다는 인식이 퍼졌고, 이는 학습 중요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낳았다. 반면 학생부종합전형이 적용되는 상황에서 학교 내신에서는 한국사가 상대평가로 운영됐기에, 여전히 높은 학습 강도가 요구됐다. 당시 수험생들이 한국사를 기피한 또 다른 이유는 서울대가 이를 필수 지정과목으로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서울대 지원자 간의 치열한 경쟁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초등학교 4학년이던 2017년에는 수능 영어 과목이 절대평가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수능에서 영어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고, 상대평가 과목들에 비해 수능에서의 중요도도 낮아졌다. 이는 전 과목 절대평가를 위한 전 단계로, 영어부터 우선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영어도 학교 내신에서는 여전히 상대평가였기에 학습 강도는 여전히 높아야 했다. 따라서 수험 전략으로는 수능 영어를 조기에 대비하고 다른 과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과, 영어의 중요도를 낮게 보고 비중을 줄이는 방식으로 나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초등학교 5학년인 2018년에는 학생부종합전형의 불공정성이 사회적 문제로 크게 부각됐다. 이른바 ‘엄마 찬스’, ‘아빠 찬스’ 등이 개입됐다는 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학생부종합전형이 중요하다는 분위기였는데, 불과 4년 만에 ‘학생부종합전형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된 것이다. 입시 방향이 180도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중학교 1학년이던 2020년에는 서·연·고 등 주요 16개 대학이 정시 40% 확대 선발로 전환됐다. 그동안 내신 위주였던 입시가,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수능 중심 체제로 급변한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학생부종합전형’ 중심이었지만, 중학교 1학년 시점에는 ‘수능 중심’으로 입시 기조가 바뀌었다.중학교 2학년이던 2021년에는 통합수능이 도입됐고, 이과생들이 문과로 교차 지원해 합격하는 이른바 ‘문과 침공’이라는 생소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 해에는 전국 약대가 학부 모집으로 전환되면서 고교 졸업 후 약대 진학이 가능해졌고, 의대 또한 2015년부터 의학전문대학원에서 학부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해 메디컬 계열 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높아졌다. 이로 인해 이과 쏠림 현상과 함께 ‘이과로 가야만 한다’는 심리적 압박도 심화됐다. 킬러문항 배제에 의대 증원까지중학교 3학년이던 2022년에는 현재 39개 의대가 모두 학부 체제로 전환됐다. 이과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의대·치대·한의대·약대 등 메디컬 계열 학과에 대한 집중도가 급상승한 상황이 됐다. 중학교 시점부터는 수능의 중요성이 커지고, 이과 진학이 대세가 되었으며, 상위권 학생들은 의대를 중심으로 몰리는 입시 환경이 형성됐다.고등학교 1학년이던 2023년에는 수능에서 킬러 문항이 배제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어려운 문항을 제거해 수능 부담을 줄이겠다는 취지였으나, 그 해 수능은 오히려 매우 어렵게 출제됐다. 킬러 문항은 빠졌지만, 수험생 체감 난이도는 결코 낮지 않았던 것이다.고등학교 2학년이던 2024년에는 의대 모집정원의 대폭 확대가 발표됐다. 해당 연도 수험생들에게는 1500명이, 현재 고3 학생들에게는 2000명이 증원돼, 전체 의대 정원은 기존 3000명에서 5000명으로 확대될 예정이었다. 의대에 대한 높은 관심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발표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커다란 입시 변수로 작용하게 됐다.고등학교 3학년인 현재는 의대 모집정원 5000명 증원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여기에 조기 대선까지 겹쳤다. 현행 투표 연령이 만 18세로 낮아지면서 올해 고3 수험생들도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대선 투표일은 6월 3일이며, 6월 평가원 모의고사는 바로 다음 날인 6월 4일이다. 이는 재수생들과 함께 보는 마지막 모의고사로, 9월 수시 원서 접수 전 최종 점검 성격이 강한 매우 중요한 시험이다.지난 12년간 초중고 시절을 거치며 경험한 입시 정책의 변화는 정책적 일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현재 고1부터 적용되는 2028학년도 대입 정책 역시 내신과 수능 모두에서 큰 폭의 변화가 예고되어 있다. 앞으로의 12년도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변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2025.04.27 08:00

4분 소요
토스와 카카오뱅크가 일궈낸 브랜드 혁신을 보라 [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1 지하철 안에서 대출이 완료됐다. 30대 직장인 김 씨는 퇴근길 스마트폰으로 토스뱅크 앱을 열어 신용대출을 신청했다. 몇 가지 정보를 입력하자 1분 만에 심사 결과가 도착했고, 300만원이 즉시 계좌로 입금됐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은행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서류를 제출하고 며칠을 기다려야 했던 과정이, 몇 분 만에 지하철 안에서 이뤄졌다.#2 새벽 3시, 어머니는 호주 유학 중인 아들에게 급히 500달러를 송금해야 했다. 토스뱅크의 '평생 무료환전' 서비스로 수수료 걱정 없이 호주 달러를 구매하고 즉시 송금했다. 영업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은행 지점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호주에서 아들이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벌써 돈이 들어왔어요!"#3 동창회 모임이 끝난 후 총무는 카카오뱅크 모임통장 연결 카드로 식당 계산을 마쳤다. 누군가 "회비 걷느라 고생 많지?"라고 묻자 총무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누가 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고, 모두가 통장 내역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서 투명해. 회비 알림도 자동으로 가니까 총무 맡은 지 2년 됐는데 스트레스가 사라졌어."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고리타분했던 은행 업무가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와 일상에 녹아들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혁신적 변화의 중심에는 토스와 카카오가 있다. 창립 10년, 출범 8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들은 어떻게 한국 금융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을까?숫자보다 중요한 소비자 경험의 혁명2024년 말 기준, 토스의 월간활성이용자 수(MAU)는 2480만명, 카카오뱅크는 1800만명, 카카오페이는 2402만명에 달한다. 국내 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들 앱을 매달 최소 한 번 이상 이용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불러온 경험의 혁명이다.토스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공급자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는 모든 금융 프로세스를 소비자중심으로 바꾸자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금융을 쉽고 간편하게'라는 브랜드 이념이다. 2015년 간편송금 앱 토스를 출시하며 당시 금융거래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공인인증서와 보안카드를 과감히 걷어냈다. 여섯 자리 비밀번호만으로 송금할 수 있는 이 혁신은 금융의 진입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이것이 소비자 중심의 첫 번째 혁신이었다토스의 브랜드 DNA는 '금융의 모든 불편함(페인포인트)을 해결한다'이다. 이것이 토스의 모든 서비스 개발과 마케팅 전략의 근간이다.토스뱅크의 '평생 무료환전'(25년 3월 말부터 700달러 이상은 수수료를 받음) 서비스는 금융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환전 수수료 부과가 당연했던 외환 시장에 수수료 무료 경쟁을 촉발한 것이다. 출시 1년도 안 돼 200만 고객을 확보했다. "왜 환전할 때 수수료를 내야 하나요?"라는 단순한 의문이 시장 판도를 바꾼 셈이다.또한 토스뱅크가 선보인 '함께대출'은 서로 다른 두 은행이 공동으로 자금을 조달해 소비자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상품으로, 금융위원회로부터 '혁신금융서비스'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존 은행들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파격적 발상이었다. 카카오의 출발도 다르지 않다. "왜 사용자가 불편을 감수해야하죠?"가 첫 번째 질문이다. 이런 철학이 반영된 것이 카카오 모임통장이다. 카카오뱅크의 '모임통장'은 한국 사회에 뿌리깊은 모임 문화에 주목한 상품이다. 통장 하나로 회비 관리의 투명성을 높이고 총무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이미 850만명 이상이 이용하는 대표 서비스로 성장했다. 14~19세 Z세대를 위한 카카오뱅크의 '미니뱅킹'도 빼놓을 수 없다. 통장 없이도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해 '미래의 고객'을 선점했다. 엄마 카드를 쓰던 10대들에게 '내 카드'라는 자부심을 심어준 건 물론이고 미래고객을 묶어두는 록인(rock-in)효과를 톡톡히 보고있다.패러다임을 바꾼 조직과 문화토스와 카카오 금융이 혁신적인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존 금융권과는 다른 조직 문화가 있다. 가장 보수적인 은행산업에서 후발 주자지만 변화를 만드는 '메기'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익숙한 '또 하나의 은행'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일례로 토스뱅크는 '도메인-트라이브-스쿼드'라는 조직 구성을 통해 각 영역이 온전한 책임을 갖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기존 은행은 기획부서와 개발부서가 분리돼 있지만, 토스뱅크는 하나의 스쿼드에 ▲상품 전문가 ▲디자이너 ▲개발자 ▲데이터분석가가 모두 속해 있다. 이런 구조가 빠른 의사결정과 고객 중심의 서비스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이들의 고민은 "은행은 원래 이렇게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보다 '고객입장에서 불필요한 이 일을 아예 없앨 수는 없을까?'라는 근본적인 생각을 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토스와 카카오 금융의 성공은 100년 이상을 이어온 공급자 중심의 시장을 단기간에 소비자 중심으로 만든 '브랜드 혁신'(Brand Innovation)의 사례다. 이들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금융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과 경험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브랜드 경험 혁신'을 일궈냈다.현재 두 기업의 자산 규모는 시중 대형 은행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지만, 고객 접점과 디지털 혁신 역량에서는 이미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특히 금융업의 미래를 좌우할 MZ세대와 Z세대 시장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어, 미래 성장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평가다.토스는 2013년 창업 이후 금융 규제 속에서도 혁신적인 간편송금 서비스로 시장에 도전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IT와 금융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가운데, 토스는 단순한 금융 서비스를 넘어 생활 플랫폼으로의 진화를 꿈꾸고 있다.카카오페이는 2025년 핵심 전략으로 데이터 수익화에 주목하고 있다. 업계 최다 수준의 마이데이터와 자사 보유 데이터를 활용해 생성형 인공지능(AI)를 결합한 금융 플랫폼으로 진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개인화된 금융 어드바이저로서의 입지를 굳히겠다는 전략은 금융의 미래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그널이다.이들 두 금융브랜드의 디지털 금융 혁신 사례는 글로벌 금융업계가 주목하는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이들이 추구하는 '불가능을 삭제한 사용자 경험(UX)'은 금융을 넘어 다양한 산업에 영감을 주고 있다. 토스와 카카오 금융, 이들의 행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허태윤 칼럼니스트(한신대 교수)

2025.04.26 10:01

4분 소요
막 오른 경제 공약 경쟁, 그리고 힘 잃은 의료개혁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오는 6월 3일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이 공약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65세 이상 버스 무료 탑승부터 핵무장까지 다양한 정책을 내고 있는데요, 경제 공약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눈길을 끕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2030년까지 ▲3% 잠재 성장률 ▲세계 4대 수출 강국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는 ‘3·4·5 성장’을 집권 비전으로 내걸었으며, 주가 5000 시대와 상법 개정안 재추진 등도 약속했습니다. 김동연 후보는 경제 위기 극복를 위해 기회경제·기후경제·돌봄경제·지역균형·세금-재정 빅딜 등 신속하고 과감한 5대 빅딜로 ‘경제대연정’을 성사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국민의힘의 한동훈 후보는 ▲인공지능(AI) 세계 3대 강국 ▲국민소득 4만 달러 ▲중산층 70% 확대를 골자로 하는 ‘3·4·7 비전’을 내놓았고, 김문수 후보는 법인세와 상속세 최고세율을 각각 21%와 30%로 인하하고, 일자리 창출 기업에 각종 세금·부담금을 감면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홍준표 후보는 ▲도심 노후 주택 재개발·재건축 ▲종합부동산세 폐지 등 주택 세제 개편 ▲징벌적 상속세 대폭 완화를 제안했습니다. 또 모든 후보가 인공지능(AI) 시대로의 대전환에 맞춰 적게는 50조원, 많게는 200조원 규모의 AI 산업 육성 정책을 경쟁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AI 기본소득 ▲무료 AI 서비스(한국형 챗GPT) ▲AI 단과대학 설립 등 ‘K-AI 국가전략’을 발표했습니다. 김경수 후보는 AI 주권 확보와 산업의 전환에 향후 5년간 총 100조원 규모 민관 공동투자를 이뤄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문수 후보는 ‘AI G3 진입’을 목표로 AI 인프라 확대와 스타트업·벤처 중심의 성장 모델을, 한동훈 후보는 200조원 규모 민관 공동 펀드 조성과 ‘AI 전사’ 1만명 양성 등을 각각 내걸었습니다. 홍준표 후보는 5년간 AI·양자·초전도체 등 첨단 분야에 최소 5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했고, 안철수 후보는 2035년까지 AI 세계 3강 진입을 약속했습니다. 각 후보들이 정쟁보다는 경제정책을 내놓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 기대가 됩니다. 이는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 트럼프발 관세전쟁 등의 여파로 국내외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서 시민들이 심각한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해 있어 후보들이 경제를 중심에 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이들 공약이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공약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실현 가능한지,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공약으로 추진한 의료개혁입니다. 의료인력 부족 해소와 지역 및 필수의료 강화, 고령화 사회 대비 등을 이유로 의대생 2000명 증원을 강행했는데, 의대생과 전공의가 교육·의료 현장을 떠나는 등 의료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양측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싸우는 사이 응급 환자들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의료개혁은 윤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되면서 동력을 잃게 되었는데요, 1년 간 의료 현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됐습니다. 의대생이 복귀했지만 수업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고, 내년 의대 정원 동결에 수험생들이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에 의료계는 의료개혁 철회까지 요구하고 있는데요,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치밀한 계획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한다면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멋진 공약이 아니라 실행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준비된 공약이 제시돼야 합니다. 그런 공약이 나오기 위해서는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유권자가 있어야 합니다.

2025.04.26 06:00

3분 소요
초고령사회, 금융 리터러시를 다시 생각하다

전문가 칼럼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달’을 보면 은행 직원이 고령의 VIP고객의 돈을 빼돌리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또 다른 드라마에서는 치매에 걸린 재벌회장님의 재산을 상속받으려는 자식들의 치열한 암투와 부모의 인지능력을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금융범죄 통계를 보면 지난해 한국의 보이스피싱 피해자 중 60대 이상 비율이 36.4%로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피해액도 700억원을 넘어선다고 한다. 이게 드라마에서나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당장 우리 부모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멀지 않은 미래에 나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고령자들이 판단력이나 대응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악용해 사기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한국 고령자의 자산 대부분은 ‘집’에 묶여 있다. 통계청의 2024년 한국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가계자산 중 부동산을 포함한 실물자산의 비중은 75%에 이른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높은 수치이다. 그런데 노인 가구의 실물자산비중은 이보다 더 높다. 그래서 고령자일수록 자산(주택 등 부동산)은 있지만 현금이 부족(Asset rich income poor)한 경우가 많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노인층에 ‘어떻게 살고 있는 집을 유지하거나 처분할 것인가’ ‘살던 동네에서 조금 더 작은 집으로 옮길 수는 없을까’ ‘노후에 맞게 리모델링을 하면 어떨까’와 같은 질문들이 현실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함께 고민해줄 정책이나 전문가 조언의 창구가 많지 않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지금 노인을 위한 금융정책, 특히 소유한 집과 노후에 삶을 의탁할 안전한 주거공간을 위한 ‘부동산 리터러시’가 절실해지고 있다. 노인을 위한 한국의 금융정책, 어디까지 왔나한국에는 고령자 자산관리를 위한 몇 가지 제도가 마련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연금이다. 평생 살던 집을 담보로 매달 일정 금액을 연금처럼 받는 제도다. 집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어, 현금흐름에 어려움을 겪는 고령자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최근에는 고령자의 인지기능 저하에 대비한 ‘치매신탁’이나 ‘후견신탁’도 은행권에서 도입하고 있다. 평소에 미리 신탁계약을 체결해두면 본인의 판단력이 약해졌을 때도 자산이 안전하게 관리되도록 할 수 있는 장치이다. 법원에서 지정하는 성년후견제도도 있다. 판단력이 약해진 사람을 위해 후견인을 선임해 자산을 보호하고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절차나 비용 부담으로 활성화 되고 있지는 않지만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확산하고 있다. 문제는 이 모든 제도가 제 역할을 하려면 당사자나 가족의 ‘선제적인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 괜찮다”라는 판단이 제도를 외면하게 만들고 그 사이 사기나 손실 위험이 커지는 구조인 것이다.미국은 이미 ‘금융 제론톨로지(Financial Gerontology)’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고령자의 금융 문제를 학문적으로 분석해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연방정부 산하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은 고령자를 위한 전담 조직을 운영한다. 사기 예방 교육 자료와 금융결정 능력 자가진단 툴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치매 초기 증상을 알아볼 수 있는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메릴린치 같은 대형 금융회사는 노년학 전문가와 함께 재무상담사 교육을 진행한다. 고령자의 건강상태나 가족관계, 주거상황까지 고려한 조언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호주의 경우는 금융학대(Financial Abuse)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사용하며, 가족에 의한 착취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고령자 명의의 재산을 대리인이 자의적으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전국단위 후견인 등록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금융기관에는 의심거래를 일시 정지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일본 역시 초고령사회를 제일 먼저 진입한 국가로 금융기관 중심의 ‘현장 대응’과 치매 대비 신탁제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금융청은 고령 고객 응대 시 인지기능 저하를 체크할 수 있도록 관찰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은행들은 치매 진단 전 신탁을 설정해 자산을 보호하는 ‘후견형 신탁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일본은 노인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문화적 특성상, 보호자 개입보다는 본인의 사전설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령자 대상 금융교육 보다는 금융사의 책임과 상품 설계 중심으로 제도를 정비해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집’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고령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고령자의 자산 보호는 이제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재정 안정성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자산이 많든 적든 노후에 자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삶의 질과 존엄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무엇보다 고령자들이 가진 ‘집’이라는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공적 조언 시스템이 필요하다. 단순히 ▲집을 처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은퇴 후 살기 좋은 도시는 어디인지 ▲경제적 여건에 적합한 다운사이징 ▲노인요양주택이나 장기임대주택으로의 이전 ▲리모델링을 통한 생활환경 개선 ▲자녀와의 동거 계획까지 포함된 통합적인 ‘부동산 리터러시’가 필요하다.최근에는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사업이 진행되는 아파트 단지에서 고령자들이 분담금 문제로 사업에 반대하거나 동의를 미루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기사를 자주 본다.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추가 분담금은 은퇴 이후 고정소득이 없는 고령자에게는 매우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로 인해 ‘삶의 질을 높이는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취지가 오히려 노인 세대에게는 불안과 소외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이런 사업들이 제대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사업성은 물론 고령의 입주민 특성을 고려한 공공의 조정기능과 지원대책을 병행해야 할 시점이다. 은행 창구나 부동산 중개현장에서도 고령자 친화적 설명과 보호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계약서를 무조건 ‘읽고 사인’이 아니라, 충분한 설명과 숙려 기간을 보장하고 의심스러운 금융상품이나 계약 권유는 사전에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지금, 우리는 누구도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고령자를 위한 맞춤형 금융교육 프로그램 마련 ▲부동산 상담 창구 개설 ▲노후자산 진단 서비스가 은행의 고액 자산가들을 위한 특별 서비스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려면 정책과 산업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2025.04.19 12:01

4분 소요
향후 3년이 국내 반도체 시장 골든타임인 이유 [스페셜리스트 뷰]

산업 일반

바야흐로 인공지능(AI)과 반도체의 시대다. 생성형 인공지능인 ‘OpenAI’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등장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함과 동시에, 인간의 삶을 한층 더 안락하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감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AI 반도체 설계 기업인 엔비디아 ▲시스템 반도체 제조사 TSMC ▲AI용 메모리인 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의 선두 주자인 SK하이닉스 ▲반도체 장비 기업인 한미반도체 등은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고공행진 중이다. 반면, 한때 전통의 강자였던 인텔의 몰락과 글로벌 1위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의 부진은 업계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韓 반도체, 반전의 기회는 지금이다삼성전자는 1974년 12월 6일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날을 기준으로 지난해 말은 한국 반도체 산업 50주년이었다. 그러나 기념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에 앞서 삼성전자 반도체를 이끄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의 전영현 부회장은 주주와 임직원들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 압도적인 기술력을 회복하고 품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지난해 반도체 부문 실적을 보면 SK하이닉스가 23조5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15조1000억원에 그쳤다. 삼성전자의 AI 반도체용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한 엔비디아의 공식 승인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적자 상태인 파운드리 산업의 시장 점유율은 8.1%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결국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월 말, 9년 만에 부활한 삼성 임원 교육에서 반도체 산업의 위기를 직접 언급하며 ‘사즉생’의 각오로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을 강조했다. 이는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사안이다.본 글에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골든타임이 향후 3년이라는 전제하에, 경영·기술·산업 생태계의 세 가지 관점에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3년으로 설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AI 반도체 기술 수요의 승부처가 향후 3년 안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OpenAI를 비롯한 인프라 기반의 AI 기술 투자의 방향성은 2027년 말에 결정된다. 이러면 엣지 컴퓨팅·온디바이스 AI의 어떤 제품군이 주류로 자리 잡을지 윤곽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 시기는 다양한 기술들이 각축을 벌인 끝에 과점 형태로 재편되는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둘째, 향후 3년이 삼성전자 중심의 파운드리 산업이 좌초할지, 혹은 TSMC와 겨룰만한 기업으로 성장할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마지막 반전의 기회일 수 있다.셋째, 현재 메모리 반도체 기준으로 약 2.5년에서 3년 정도의 기술 격차를 보이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추격해 올 가능성이 커지는 시기가 향후 3년이기 때문이다. 그 격차를 유지하거나 다시 벌려야만 한국의 메모리 주도권이 유지될 수 있다. 반도체 승부수, 세 가지 관점을 보라이처럼 골든타임인 향후 3년 안에 국내 반도체 산업이 승부를 보려면 세 가지 관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첫 번째 관점은 반도체 기업의 경영 패러다임 변경이다. 국내 반도체는 1960년대의 미국이나 1970년대의 일본보다 늦어진 약 20년 후에나 관련 사업에 착수했다. 후발주자로서 추격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1974년 1월 26일 삼성에 인수된 한국반도체의 사업은 답보상태였다. 그러다 1983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도쿄선언’을 통해 사업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이 회장은 일본이 미국에게 이긴 유일한 산업이 반도체임을 알고 있었다. 이에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그룹의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라고 주문했다.이후 용인시 기흥구에 반도체 생산단지 1라인 조기 착공에 돌입했다. 1987년 초 전자산업 수요 감소로 반도체 사업 자체의 위기감이 고조됐던 시기에도 이 회장은 생산단지 3라인 투자를 지시했고 결국 이는 결실을 맺었다. 이와 같은 주문들이 현재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 성공을 이끌었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이후 10년 만인 1993년, 국내 반도체는 디램(DRAM)분야 세계 1위에 오르며 현재까지 메모리 분야 1등을 지키고 있다. 보통 반도체는 ‘설계’와 ‘생산’,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삼성과 인텔은 설계와 생산을 모두 내부에서 처리하는 종합 반도체 회사를 표방했다. 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기업 내부에서 모두 운영하는 것은 내부 기술 협력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다. 다른 회사들은 쉽지 않은 일인 셈이다.하지만 시간이 흘러 제품군이 PC에서 모바일, 그리고 AI까지 확대되는 시점에서 한 회사가 모든 반도체의 설계와 생산을 장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각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인텔은 삼성전자와 달리 모바일 부문에서 반도체 사업의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삼성전자는 지난 2017년 인텔을 제치고 글로벌 반도체 1등 기업으로 올라섰다. 당시 인텔의 최고경영자(CEO)는 기술에는 문외한인 사람이었다. 결국 CEO의 의사결정 실패로 위기에 몰린 셈이다.종합 반도체 회사에서 설계와 생산을 나누는 방식을 창안한 곳은 TSMC다. 특히 TSMC에는 여러 반도체 설계회사들이 몰렸다. TSMC가 반도체 설계 특화 회사로 올라선 배경이다. 자연스레 TSMC는 반도체 시장 장악에 성공했다. 하지만 몇 가지 사건에서 보듯 설계 분야에 있어 삼성전자의 성과는 요원하다. TSMC와 삼성이 애플 아이폰 생산으로 경쟁하던 지난 2014년, 삼성은 설계 분야의 핵심 기술 기업인 ARM의 기술까지 내재화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결국 아이폰 생산 수주를 TSMC에 내어주는 단초를 제공하게 됐다. 또한 삼성전자는 모바일 반도체 설계 기업인 퀄컴의 스냅드래곤 설계의 핵심을 알아내고자, 퀄컴의 기술을 삼성 모바일폰 설계에 활용했다. 그리고 자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핵심 부품인 코어까지 맞춤형으로 제작하는 ‘몽구스 프로젝트’를 극비에 운영했지만 2019년 결국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두 번째 관점은 생산에 있어서 ‘삼성전자는 모두의 적, TSMC는 모두의 친구’라는 일갈을 냉정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고객과 경쟁하지 않는 TSMC는 설계 회사의 기술 보안을 위해 생산 라인을 따로 지정하고, 내부 직원의 정보 유출마저 강력히 단속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핵심 기술을 제외하면 고객이 요청하는 정보에 대한 문서가 체계화돼 있고, 고객 대응 조직이 상당히 두터운 편이다.반면 삼성전자는 이미 선단 공정의 첨단 기술 문제나 수율이라는 생산성 문제에 뒤처져 있음에도 내부 기술보안 정책을 기준으로 정보 공개에 서툴거나, 내부 의사결정 구조를 이유로 대응이 늦은 편이다. 결국 이런 상황은 업의 개념에 대한 성찰이 요구됨을 보여준다.세 번째 관점은 반도체 산업 생산체계에서 상생협력의 기조를 재수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산업 후발주자로 제품 개발에 집중하며 반도체 생산을 위한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를 해외에서 주로 조달하는 방식으로 운영했었다.국내 대기업들은 주로 수입 대체를 위한 협력사를 양성해 국산화를 달성하는 전략을 썼고 이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특히 일부 산업의 경우 완전 국산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반도체 설계도는 이미지에 불과할 뿐, 반도체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를 조절해야 할 정도로 극단적인 미세 공정을 통해 만들어 내야 한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방해하기 위해 글로벌 장비사의 수출 금지를 전략으로 세웠듯이, 장비가 없다면 유려한 설계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만큼 반도체 제조에서 장비업체가 중요하다는 얘기다.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이후 국내에는 소부장 업체들이 생겨났으며 국산화 비율이 상승했다. 하지만 2023년 산업연구원의 통계를 보면 장비 국산화는 22%, 소재 국산화는 34%에 그친다.또한 반도체 장비 기업은 ‘슈퍼을’의 위치에 있다. 국내 장비회사들은 독자적인 기술력 개발이 어려운 상황에서 때로는 글로벌 장비사와 특허소송에 휘말리기도 하며, 장비의 단가를 낮추는 전략적 도구로 오용될 위험에 노출돼 있다.결국 전략적 협력을 통해서 글로벌 1등 기업들과 함께 과점의 형태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살아남는다. SK하이닉스는 소재 회사를 중심으로 인수합병을 진행했다. 수출 규제 항목이었던 극자외선용 감광액(PR, Photo resist)을 SK머티리얼즈에서 국산화에 성공했고, HBM의 핵심소재 EMC(Epoxy Molding Compound·반도체 방습·발열을 하는 탄소 물질) 관련 일본회사와 독점적 계약을 맺고 경쟁력을 확보했던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또한 대만의 사례도 눈에 띈다. 대만은 산업 정책상 반도체 장비 기업을 양성하는 것보다는 글로벌 회사의 장비 구매 방식을 활용했다. 구매 이후 품질 보증기간이 끝난 뒤 장비 유지보수와 개조개선 회사를 자국 내에서 양성해 ‘장비사 수입대체’ 방식을 피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전략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인재와 기본기최근 글로벌 인재 유치를 위해 모든 기업이 발 벗고 나서는 상황에서 ‘국내 1등 기업’이라는 타이틀은 더 이상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요소가 아니다. 기술로 창업에 성공한 이들이 새로운 세대로 등장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사업의 의사결정 방향이나, 세부적인 연구개발을 위해 재무 담당자에게 기술인력이 허락을 받는 의사결정 방식은 개편돼야 한다.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는’ 스탭 조직과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기술부서의 의사결정 구조 및 권한 배분 방식도 변경돼야 한다.결국 기술에 대한 면밀한 존중이 필요하다. 또 기술 인력을 중시해야 한다. 故이병철 회장은 1976년 상공회의소 기고문에서 ‘인재 확보와 양성을 못하는 것은 부실 경영만큼 기업인의 범죄’라고 강조했다.수율을 중심으로 하는 반도체 제품 생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업의 ‘현재’가 무너진다. 수율은 투입 수에 대한 완성된 양품(良品)의 비율을 말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불량률의 반대어다. 수율은 특히 반도체의 생산성, 수익성 및 업체의 성과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산업과 달리 반도체 수율은 특정 연구개발 조건을 바꾼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연구소에 천여개에 달하는 공정 조건을 만들면, 제조센터에서 수많은 장비로 동일한 공정 결과를 구현해야 수율 확보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수천대의 장비가 똑같이 움직일 때만 가능하다는 얘기다.현재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TSMC, 인텔 등의 모든 반도체 기업들은 90% 이상 동일한 글로벌 장비를 쓰고 있다. 왜 같은 장비를 쓰는데 수율에서 차이가 있을까?삼성전자는 반도체 핵심 제작 신기술을 먼저 개발하고도, 수율을 확보하지 못해 결국 TSMC 추격에 실패하기도 했다.수율 문제는 단품 중심 경영에서는 이익 창출의 문제겠지만,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비즈니스 기회 창출과 연결되는 핵심 사항이다. 이 문제는 천재급 인재를 데려와도 해결되는 부분이 아니다. TSMC는 어떻게 수율을 확보한 신규 제품을 꾸준히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이는 결국 기술의 기본기를 강조하고 존중했다는 데 있다. 최근 반도체 칩을 이어 붙이는 ‘패키지 공정’은 반도체 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삼성전자HBM의 성공과 실패에는 패키지 공정 개발을 단시간에 추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품 개발 중심 기술 임원들의 오판이 작용했다.TSMC가 삼성전자에게서 애플 수주를 빼앗아 올 때도 패키지 공정의 진일보가 있었다. 이후 TSMC는 패키지 공정마저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개발하고 있으며, 설계 회사들은 고비용을 지불해야 함에도 TSMC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SK하이닉스 또한 상대적으로 전략적 움직임보다는 기술 인재들을 존중했고, 설계와 제품 중심이 아니라, 공정과 장비기술 및 웨이퍼 공정과 패키지 공정의 수평적 위계를 통해서 미세공정에 대한 대응력을 높였다. 반도체, 안정된 생태계 확보돼야최근 대기업에서는 시니어 인력들을 ‘뒷방 늙은이’라고 힐난하면서 그들의 숙련을 고임금의 저성과자로 간주하며 쫓아내기 바쁘다. 생태계 확보가 돼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모욕을 감내하며 버티고 있다. 대기업은 인력 순환의 정점이 돼 산업 인력 양성소가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들어간 인재들은 대기업이라는 온실에서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천천히 썩어가고 있다.국내에서 적절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기술 유출의 혐의를 받으며 해외 기업으로 이직하는 사례도 생긴다. 반면 중견기업에서는 신입사원의 절반이 중고신입으로 1년 만에 퇴사하는 등 인력난을 겪는다. 중견기업의 신입 직원들은 1년 전후로 다닌 경력을 없애더라도 취업시즌이 되면 대기업 신입 채용에 눈길을 돌린다. 대기업이 최종 종착지가 돼버린 지금, 산업 생태계 확보 및 중견기업 이하 처우 개선은 국가 차원에서 돌아봐야 하는 문제다. 반도체 산업협회의 2022년 통계에 따르면, 2030년까지 반도체 인력은 약 30만명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현재 양성되는 방식으로는 약 7만7000명 정도가 부족한 실정이다.특히 대기업들은 ‘계약학과’ 방식으로 우수 인력들을 미리 확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도체 계약학과의 경우 실제 현장과 동떨어진 수업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계약학과 학생들의 의대 쏠림 현상도 나타나고 있어 인재 확보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반도체 장비는 정밀한 ‘기계 설계’와 ‘가공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이에 우수 기계공학 전공자들이 필요한 분야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에서 화학 반응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에도 유관된 전공에서 관련 지식체계를 습득하지 못하는 실정이다.기술인재 양성 대학인 폴리텍 대학은 최근 반도체 전공을 강화하고 특성화고와 마이스터고 등에서도 반도체 학과가 생겨나고 있지만 여전히 숙련 기술직에 대한 선호도는 낮다. 정부가 인력 양성의 미스매치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연한 정책을 펴야 할 때다. 또한 반도체 생태계 안에서 더 취약한 위치에 놓인 기업들에게 두터운 지원이 필요하다. 반도체 수율의 핵심적인 기능은 아주 작은 볼트·너트의 품질에 달려 있다. 체결과 구동의 미묘한 품질 변화가 곧 기술력이다.그렇지만 볼트·너트 등 값싼 소모품을 제조하는 기업들은 매우 영세하다. 국가 단위에서 반도체 신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개발 지원은 당연한 과제이지만 기술의 근간을 이루는 정밀 기계 공업, 소재의 순도에 영향을 미치는 정밀 화학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회사를 위한 기술 인프라 확보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향후 반도체 미래 3년에 가장 단단한 뿌리며 줄기가 될 것이다. 이처럼 국내 반도체 산업은 기술 인재의 존중과 중요 기술에 대한 재정의가 시급히 요구된다. 또 생태계 확보를 위한 전 국가적 노력은 몇몇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두텁게 쌓아가야 한다. 한국 반도체의 명운이 걸린 앞으로의 3년을 위해 이제 하루에 한 걸음씩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해야 할 때다.

2025.04.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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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미운데 스트레스가 안 미우랴? [이코노 헬스]

전문가 칼럼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저지른 ‘행동’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함의가 있겠다. 만약 스트레스가 사람의 정신건강을 힘들게 하는 죄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가 개인에게 가하는 몸과 마음의 고통은 피해야(미워해야)겠지만, 스트레스 자체는 인간에게 쓰임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트레스에도 용도가 있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개똥도 약에 쓴다고 하지만, 스트레스는 그만도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똥이 스트레스처럼 불쑥불쑥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 갑자기 찾아와서는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스트레스 대처 이론(Stress Coping Theory)에서는 그 ‘힘듦’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환경에 적응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상호작용적(interactional) 혹은 거래적(transactional) 스트레스 모형이다. 라자루스와 포크만(Lazarus and Folkman, 1984)에 따르면 스트레스는 개인이 환경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상황이 개인 안녕을 위협한다고 여길 때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주장이다. 위협적인 상황에서 개인은 인지적 평가(cognitive appraisal)와 대처 전략(coping strategy)으로 스트레스를 관리한다. 인지 평가는 1차 평가(primary appraisal)와 2차 평가(secondary appraisal)로 나뉜다. 1차 평가는 상황에 대한 판단이다. 내가 이 상황을 스트레스가 아닌 도전(challenge)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는 위협(threat)으로 받아들일지 분류한다는 설명이다.상황을 변화할 수 있다면 '도전'으로 받아들여2차 평가는 내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지 대처 자원을 확인하는 단계다. 대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문제 중심 대처(problem-focused coping)다. 스트레스 요인 자체를 변화시키는 행동이다. 다른 하나는 감정 중심 대처(emotion-focused coping)다. 요인 자체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정서를 완화하기 위한 대응이다. 현실에서는 두 전략을 혼용하는 경우가 다수다. 그럼에도 개인은 상황이 변화 가능하다고 판단할 때(도전) 문제 중심 전략을, 변화가 어렵거나 변화 가능성이 떨어질 때 감정 중심 전략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두 학자의 발견이다.20대 A씨는 직장에서 겪는 문제를 위협으로 인지한듯 했다. A씨는 최근 스트레스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직장 상사 탓이었다. 상사가 온갖 일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타박을 주니, 밤이 되면 속상한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바람을 쐬면서 기분 전환을 하거나 친구에게 속풀이를 하는 식으로 화를 삭이려 했다고 그는 말했다. 상사라는 문제 요인을 제거할 수 없으니, 화를 식이는 감정 중심 대처를 시도했던 셈이다.이 설명에서 스트레스가 약이 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스트레스 여부가 나에게 닥친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지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면 된다. 위협 상황이더라도 스트레스는 일정 부분 쓰임이 있다. 스트레스가 문제 중심 대처를 하는 자극제처럼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입에서는 쓰지만, 일정 부분 좋은 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입에 쓴 약이 전부 명약(名藥)은 아니듯, 스트레스가 반드시 좋은 약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문제에 기민하게 반응하더라도 반응 과정에서 생긴 고통마저 없던 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정 중심 대처를 선택했다면 어려움은 한층 커진다. 상황 변화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 상태에서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을 삭이는 셈이기 때문이다.문제 바꿀 수 없을 때 자신의 ‘화’ 삭이는 감정 중심으로 대처 A씨도 그랬다. 문제 중심 대처를 시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상사의 마음을 돌리려 자발적으로 철야를 하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화를 삭이고 나아질까 싶으면 상사가 여지없이 훈계와 잔소리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화를 삭이는 방식에도 한계가 있었던 듯했다. 자신은 되도록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왔다”며 강력히 권유해서 내원을 선택했다고 그는 말했다. 혼자만의 대처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충분치 않았던 셈이다.A씨와 같은 경우를 보다 보면 자연히 스트레스가 미워지곤 한다. 죄를 미워하는 데 사람을 어떻게 안 미워하느냐는 말이 떠오른다. 죄와 사람을 분리해서 볼 수 없듯,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게 스트레스인데 양자를 어떻게 분리해서 볼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든다.어찌 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실이야말로 스트레스 대처의 마지막 전선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들이 문제·감정 중심 대처 속 고통을 이겨내고자 찾는 ‘분투 현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전선에 함께 선 입장에서 의사가 할 일도 정해져 있겠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날 때까지 고통을 덜고 줄여내서, 우리 모두가 스트레스를 다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2025.04.1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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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목받는 스타트업 스튜디오…VC와 어떤 차이점이[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스타트업 스튜디오(Startup Studio) 보육 모델이 침체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데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스타트업 스튜디오 제도화를 둘러싼 논의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스튜디오는 스타트업 육성의 모든 단계에 적극 관여하는 보육 및 투자 모델이다. 창업자의 제안서를 읽거나 사업계획서 발표를 평가해서 피투자 스타트업을 선발하는 창업 기획자나 벤처 캐피털들과 달리, 스타트업 스튜디오는 창업자와 함께 창업 아이템을 찾아 나선다. 투자금 유치는 물론 투자금 회수(exit)까지 함께할 정도로 스타트업의 생애 주기 전반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필자는 몇 년 전 유럽 출신의 외국인 투자자를 만나면서 스타트업 스튜디오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창업자 출신인 그는 잠재력 있는 스타트업을 찾고자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국을 방문한 목적 역시 투자할 스타트업을 찾기 위해서다. 1990년대 중반 나온 컴퍼니 빌딩과 비슷스타트업 스튜디오가 새로운 개념처럼 보이지만, 과거에도 비슷한 유형의 창업 기획 제도가 있었다. 바로 컴퍼니 빌딩(company building)이다. 이름처럼 투자자와 창업자가 함께 회사를 만들어가는 보육 모델이다. 컴퍼니 빌딩의 시초는 1990년대 중반 북미에서 설립된 기술 창업 육성 기업 ‘아이디어 랩’(Idealab)이다. 한국에서는 2012년 처음으로 패스트트랙아시아(Fast Track Asia)가 컴퍼니 빌딩을 표방하며 오늘날까지 여러 스타트업을 육성해오고 있다.북미와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컴퍼니 빌더들은 굵직한 성공 사례들을 내놓으며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컴퍼니 빌딩은 낯선 제도이다. 해외 성공 사례를 빠르게 내재화하는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이례적으로 컴퍼니 빌딩 모델이 쉽사리 정착하지 못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벤처촉진법의 보호를 받는 창업 기획자 혹은 벤처 캐피털과 달리, 컴퍼니 빌딩은 상법의 영향을 받는다. 창업 기획자는 외부에서 투자금을 얻어 펀드를 조성하여 이를 피투자 스타트업 지분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투자한다. 이에 반해, 컴퍼니 빌딩은 내부 자금을 활용하거나 자체적으로 확보한 자본을 이용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동시에 기업 운영에 적극 관여한다. 내부 자금 활용과 지배적으로 보이는 경영 간섭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창업 기획자와 벤처 캐피털의 투자 모델이 한계점을 드러냈다는 시각도 있다. 투자자인 그들은 외부 자금으로 결성된 펀드를 운용한다. 피투자 기업이 성장하는 데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컴퍼니 빌더만큼은 아니다. 창업 초기부터 창업자와 함께 아이템을 기획하고 공동 성장하는 컴퍼니 빌더들이 보육 회사에 임하는 자세는 특별하다. 업계에서 활동하는 한 컴퍼니 빌더는 “컴퍼니 빌더와 보육 스타트업의 관계는 공동 창업자의 관계처럼 소유권을 나누어 가진 사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외부에서 투자금만 지급하는 투자자와의 관계와는 분명히 다르다.”라고 말했다. 최근 컴퍼니 빌딩 모델이 스타트업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하는 현상을 국내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변화하는 신호탄으로 보는 흥미로운 의견도 있다. 국내 벤처 캐피털은 금융업 색채가 강하다. 실제로 자금 운용 규모를 기준으로 상위권에 속한 대다수 벤처 캐피털은 금융사에 속해 있고, 스타트업 투자를 담당하는 다수의 심사역은 금융인 출신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외에서 스타트업 스튜디오 모델을 제안하고 주도하는 이들 대부분이 창업자 출신임을 주목하고 있다. 즉, 스타트업 스튜디오 모델은 금융인이 주도하는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 창업자들이 존재감을 보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치고 있다. 스타트업 스튜디오 국내 정착할 수 있나 지난 3월 스타트업 스튜디오 활성화를 위한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스타트업 관계자와 입법 기관 관련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침체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살리고자 지혜를 모으는 자리였다. 업계는 이날 토론회를 통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스타트업 스튜디오 모델 도입에 진척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스타트업 스튜디오 모델이 공식적으로 정착한다면, 시장에 크고 작은 변화가 예상된다. 먼저 법과 규제에 가로막혀 어렵게 활동하고 있는 소수 국내 컴퍼니 빌더들의 행보가 과감해질 것이다. 해외 스타트업 스튜디오들이 국내에 진입해 활동할 동인도 생긴다. 이 외에도 투자 시장에서 창업자들이 더욱 앞장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해외에서 스타트업 스튜디오는 최근 몇 년간 큰 주목을 받은 보육 모델이다. 북미 지역에서는 성공한 창업가들이, 가족 기업이 많은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는 패밀리 오피스들이 벤처 스튜디오 모델을 활용해 창업 꿈나무들을 적극 후원해 왔다. 과연 스타트업 스튜디오 모델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 알맞게 정착할 수 있을지 유심히 지켜볼 이유는 충분하다.

2025.04.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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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의 조선 협력 시 잊지 말아야 할 것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미국 조선업의 재건을 도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는데요, 중국의 해양 패권 확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며 행동에 나선 겁니다. 미국은 과거 조선업 강국이었습니다. 1920년 ‘존스법’(The Jones Act)을 제정해 미국 내에서 운항·정박하는 모든 선박은 미국에서 건조돼야 한다고 강제하면서 자국 조선산업을 적극 보호·지원했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이 전 세계 선박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해상 패권을 거머쥐었습니다. 미국은 1970년대에는 매년 수십 척의 대형 선박을 건조하며 18만명 이상의 조선업 종사자를 고용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 초에 도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건조 차액 보조금(CDS)을 없애며 조선업계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중단하면서 미국 조선업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사이 한국을 비롯해 일본·중국이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조선업을 육성해 글로벌 강자로 떠올랐고, 미국은 1980년대말 46개 조선소가 문을 닫고 노동자 4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우리는 아주 많이 뒤처져 있다. 예전엔 하루에 한 척의 배를 만들곤 했지만, 사실상 지금은 1년에 한 척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쇠락한 미국 조선업의 현실을 토로했습니다. 미국은 선박 건조부터 미 해군의 군사 활동을 지원할 상선을 보유해 해양 패권을 회복하겠다는 계획인데요, 문제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 조선 1위 경쟁력을 갖고 있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최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통화하면서 조선업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다른 나라와의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존스법 폐지와 동맹국에서 자국 선박을 건조할 수 있게 하는 ‘미국을 위한 선박법’ 발의 등 여러 조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서는 기회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체 건조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 다른 나라에서 최첨단 선박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한국 조선업체들이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특히 막혀 있던 미국 군함이나 상선, 혹은 대규모 선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정부는 조선 협력을 미국과의 관세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세계 1위 K조선이 위기의 순간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여 다행입니다.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K조선의 미래 경쟁력입니다. K조선이 세계 1위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용접·도장 등 현장 기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외국인 노동자에 의존하고, 엔진·기자재·자동화 시스템 등 부품·소재·기술의 해외 의존도가 높으며, 친환경 선박으로의 전환에도 대응해야 하는 등 문제점도 산적합니다. 경쟁국인 중국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체 경쟁력을 더욱 고도화하고 만성적인 문제점을 동시에 해결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과의 조선 협력은 K조선의 미래 경쟁력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2025.04.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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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태어난 아이는 60년 후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지난 3월 20일, 국회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각각 13%, 43%로 인상하는 모수조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역대 세 번째 국민연금 개혁이며, 노무현 정부의 개혁 이후 18년 만의 일이다. 이번 개혁을 통해 2055년으로 예상됐던 기금고갈을 10~15년가량 늦췄고, 소득대체율 역시 인상해 재정안정과 소득보장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 정치권의 설명이다. 개혁안 통과 직후, 거물급 정치인들은 오랫동안 미뤄졌던 연금개혁에 환영의 목소리를 냈고 다수의 전문가도 의미있는 진전이라는 평을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국회 통과 직후 이뤄졌던 여론조사에 따르면, 50대 이상에서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반면, 2030세대의 반응은 아주 냉랭하다. 소득보장론자 vs 재정안정론자 이번 연금개혁을 이해하려면 노무현 정부 당시 연금개혁을 되짚어봐야한다. 2007년 연금개혁의 주인공은 노무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총대’를 맨 유시민 복지부장관이었다. 당시 국민연금은 보험료율 9%에 소득대체율이 60%였다. 본격적으로 저출산이 본격화되던 시점, 국민연금이 지속 불가능한 것은 누가 봐도 명약관화했다. 유 전 장관은 ‘낸 만큼 받는’ 연금제도를 만들고자 했다. 보험료 15.9%에 소득대체율 50%로 모수조정을 하는 것이 최초 개혁안의 골자였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의 개혁안을 거세게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보험료는 9%로 유지하되, 소득대체율만 향후 20년에 걸쳐 40%까지 삭감하는 미완의 개혁으로 마무리됐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기금고갈까지 15~20년 가량의 시간을 추가로 벌게 됐다.그 과정에서 이후 18년간 연금개혁의 주역이 될 두 전문가 집단이 탄생한다. 소득보장론자와 재정안정론자다. 소득보장론자는 소득대체율이 삭감된 것을 심각한 문제로 봤다. 소득대체율이 40%로 유지되면 심각한 노후빈곤이 해소될 수 없다고 인식했다. 소득대체율을 이상적으로는 60%까지, 그게 어려우면 최소 50%까지 인상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재정안정론자는 개혁 후에도 수지균형이 달성되지 않아 기금이 여전히 고갈되는 점을 문제 삼았다. 소득대체율을 추가로 삭감하거나, 아니면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하고 보험료를 인상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그 후 18년간의 연금개혁 논의는 소득보장론자와 재정안정론자의 힘겨루기로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며 진보의 소득보장과 보수의 재정안정이라는 이념적 대치 상태로 논의 구조가 진화했고, 정권이 바뀌며 공수가 바뀔 뿐 평행선을 달리는 고착구조는 풀리지 않았다. 논의가 길어지며 소득보장도, 재정안정도 점차 멀어져갔다.팽팽한 균형을 깬 것은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였다. 전문가 집단의 합의는 불가능한 것이 명백해지자, 진보와 보수는 국민들에게 소득보장과 재정안정 중 어떤 가치가 중요한지 확인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기로 합의했다. 2024년 4월, KBS에서 전국에 생방송된 공론화위원회가 그것이다. 여러 의제가 있었지만, 핵심은 소득보장안, 즉 ‘더 내고 더 받기’(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와 재정안정안, 즉 ‘더 내고 그대로 받기’(보험료율 12%, 소득대체율 40%)의 선택이었다. 500명의 국민대표는 ‘더 내고 더 받기’안에 56%의 지지를 보내며 소득보장론자의 손을 들어줬다. 법안 통과 전 연금개혁 논의가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보험료율 13%에 대한 양당의 공감대는 이미 형성됐고, 공론화위원회 결과에 따라 소득대체율 인상은 기정사실인 상태에서, 그 수치를 놓고 치열한 수싸움이 있었다. 공론화위원회 이후 1년가량의 ‘밀당’이 있은 후 ‘1343 개혁’(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3%)가 양당의 합의하에 통과됐다. ‘2007년 체제’의 형성 이후 18년간의 논쟁의 종지부를 거대양당이 절충하는 모양새로 이끌어 낸 셈이다.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연금은 지급된다?법안 통과 직후 반응은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진영에서는 공론화위원회의 지지를 받은 50% 소득대체율에서 후퇴한 개혁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고, 보수 진영에서는 기금고갈을 해소하지 못했는데 소득대체율을 올린 것에 반발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진보-보수간 차이보다는 세대간 인식의 간극이 훨씬 더 커 보인다. 2030을 중심으로 어차피 기금고갈이 되면 연금을 받지 못하는데, 소득대체율을 올려 미래세대의 부담이 더욱 가중되는 것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이러한 젊은 세대의 분노에 이번 개혁안에는 국가의 지급보장이 담겼고, 따라서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연금은 지급될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있다. 실제로 기금이 고갈됐다고 연금급여 지급이 완전히 고갈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경제가 파탄 난 우크라이나도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연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 좋은 사례다.하지만 보험료를 걷을 때 약속했던 급여를 모두 받을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약속했던 급여를 소급해 삭감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공무원연금이 그렇다. 1960년에 도입된 공무원연금은 2001년 기금이 고갈됐다. 악화되는 공무원연금 재정을 해소하기 위해 2015년 박근혜 정부는 기여금을 인상하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에 해당하는 지급률을 삭감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후 공무원연금 가입자는 국민연금 가입자의 2배를 내고 1.7배만을 받게 됐다. 국민연금 가입자에게 주어지는 퇴직연금이 공무원에게는 없는 것을 감안하면, 젊은 공무원들이 국민연금에 가입시켜 달라는 볼멘소리를 내는 건 당연하다.박근혜 정부의 공무원연금 개혁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건 젊은 공무원들만이 아니다. 이미 은퇴해 연금을 받고 있던 기존 공무원연금 수급자들도 급여를 소급삭감 당했다. 물가상승률 연동 급여인상분을 5년간 동결하는 방식이었다. 크게 악화된 연금제도를 받아든 젊은 공무원들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함이기도 했고, 악화된 재정을 일부나마 개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기금이 고갈돼도 연금이 제대로 지급되는 건 앞 세대보다 다음 세대의 인구가 많고 더 부유할 때만 성립한다. 기금이 없어도 연금제도는 유지된다는 인식은 대부분의 국가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고, 경제도 지속적으로 성장했던 20세기엔 유효했다. 공적연금이 앞 세대를 뒤 세대가 부양하는 제도라는 인식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기반한다.하지만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 중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노예제도가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고, 참정권이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시절이 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화하면 그에 맞춰 제도 역시 바뀌어야만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후세대가 앞 세대보다 인구가 많고 더 부유한 것은 더 이상 참이 아니다.기금이 고갈돼도 국가가 존재하는 한 연금은 지급된다는 주장 자체는 참(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약속된 연금을 제대로 다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오늘 태어난 아이가 국민연금에 기여하려면 최소 18년, 젊은이들의 사회 진출이 느린 우리나라 현실을 반영하면 30년 가까이 걸린다. 국민연금과 관련한 2050년대의 인구구조는 2025년 현 시점 확정됐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기금이 고갈돼도 정부의 지급보장이 있으니 급여를 못 받을 일은 없다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 지급보장이 없어도 상황이 되면 급여는 제대로 지급되며, 지급보장이 있어도 상황이 안 되면 약속된 연금을 받기 어렵다. 공무원연금 역시 지급보장이 이미 법제화돼 있었음에도 기은퇴자 급여의 소급삭감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국민연금의 원가와 1700조원의 미적립부채국민연금을 낸만큼만 받아가면 어떨까. 젊은 시절 낸 보험료에 기금운용수익률만큼을 더한 수준만 은퇴 이후 받아가면 다음 세대에 미움을 받을 일도, 앞 세대를 미워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낸 만큼만 받아가는 국민연금의 보험료, 즉 ‘똔똔’이 되는 국민연금의 ‘원가’는 얼마일까?가정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의 평균적인 수명과 지난 40여년간의 기금운용수익률 수준을 상정하면 보험료 1%당 소득대체율 3.3% 정도가 수지균형이다. 따라서 13% 보험료율에 걸맞은 소득대체율은 43% 전후다.수리적인 관점에서 1343 개혁의 가장 큰 함의는 개혁 이후엔 수지균형이 달성된다는 점이다. 개혁 이후엔 낸 만큼 받아가는 셈이니 뒤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지도, 앞 세대의 빚을 갚아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는 기금이 영속되는 경우에만 성립하는 명제다. 낸 것보다 많이 받는 제도를 38년간 유지했기에 모자란 금액이 있다. 이를 미적립부채라 부른다. 이 금액은 1700조원에 이른다. 이를 해소하지 않고는 기금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 빚에는 이자가 붙어 불어나는 법이다.미적립부채 해소 없이는 시간의 문제일 뿐 보험료를 추가로 인상하거나, 연금급여를 삭감하거나, 아니면 둘 다 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젊은 세대가 갖는 불만은 정당하다. 2030세대, 나아가 그 다음 세대에게 지속 가능한 연금제도를 물려주기 위한 핵심과제는 바로 미적립부채 해소다. 자동조정장치 vs 선제적 국고투입큰 빚을 갚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원금을 탕감받거나, 아니면 최대한 빨리 조금씩 갚아가거나. 1343 개혁 이후 구조개혁 논의를 위한 연금특위가 첫발을 내딛은 현시점에 미적립부채 해소를 위해 제안된 방식은 ‘자동조정장치’와 ‘선제적 국고투입’ 두 가지다. 자동조정장치는 2024년 9월, 정부가 제안한 연금개혁안에 담긴 내용이다. 국민연금은 물가상승에 따른 구매력 하락을 막기 위해 급여를 물가상승률에 연동해 인상해 준다. 자동조정장치는 이를 없애거나 줄임으로써 연금급여 총액을 실질적으로 소급하여 삭감하는 것이다. 발동시점과 삭감 폭을 적절히 조합하면 기성세대의 삭감 폭을 미래세대의 삭감 폭보다 크게 할 수 있다. 정부가 구체적인 수치를 발표한 바는 없지만, 지난 2024년 복지부 국감에서 흘러나온 자료를 보면 10-20%가량 삭감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기금고갈 시점을 2080년대 중반까지 늦출 수 있다.선제적 국고투입은 필자가 21대 국회 연금특위 민간자문위원으로 제안한 것이 최초다. 통상 모수 조합을 따와 ‘416안’이라 불린다. 416안의 핵심 아이디어는 기초연금에 투입되는 재정을 일부 국민연금으로 돌려 미적립부채를 선제적으로 해소함으로써 국민연금 기금고갈을 영원히 막자는 것이다.우리나라 노후소득보장체계는 국민연금만 있는 게 아니다. 올해 기준 65세 이상 노인 하위 70%에게 34만원 가량의 기초연금이 지급되는데, 본인이 기여한 보험료를 돌려받는 개념인 국민연금과 달리 기초연금은 전액 재정으로 지급된다. 2024년 기준, 기초연금은 GDP(경제총생산) 1%에 해당하는 24조원이 지급됐다. 같은 해, 국민연금 지급총액이 44조원이었음을 감안하면, 기초연금 규모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향후 노인 인구가 늘어나며 기초연금에 GDP 2%를 넘는 수준의 재정이 투입될 것으로 추정된다.기초연금은 2007년 노무현 정부의 개혁 때 도입됐는데, 당시 국민연금 가입률도 낮고, 수급액도 적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던 노인세대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보장을 해주자는 취지였다. 최초 10만원씩 지급됐던 기초연금은 대선을 몇 번 거치며 크게 올랐고, 기초연금이 국민연금을 위협한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기초연금 도입 후 20여년 가까이 흐른 지금,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충분히 긴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했다. 가난했던 2007년의 노인과 달리, 2025년의 노인은 젊은 세대보다 부유하다. 그리고 “젊은 노인”의 빈곤율은 주택연금 수령을 가정하면 전체 인구의 빈곤율보다 높지 않다. 미적립부채 해소를 위해서는 2030년부터 GDP 1%씩을 투입해야 한다. 재정여력이 충분하면 기초연금 조정 없이 국민연금에 재정투입을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가의 재정여력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재원을 확보하지 않고 선제적 재정투입을 주장하는 건 공염불이다. 다행히도 국민연금 제도가 자리잡으며 앞으로 은퇴할 세대의 기초연금을 일부 조정할 여지가 생겼다. 이미 기초연금을 받고 있는 1960년생과 그 앞 세대는 그대로 하위 70%에게 지급하되, 2026년에 은퇴하는 세대부터 그 대상을 조금씩 축소하여 장기적으로 노후빈곤선 이하에게 지급한다면, 지급액을 40만원으로 인상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절감되는 재정이 GDP 1%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를 국민연금에 투입하면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거의 대부분의 재정 문제가 해소된다. 필자가 주장하는 선제적 재정투입은, 이제까지 노인에게만 활용됐던 국가재정의 일부를 미래세대를 위해 기금에 적립해 주자는 것이다.남은 과제는...‘불편한 현실’ 직시해야앞으로 있을 구조개혁 논의는 1700조원의 미적립부채가 쌓였다는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방법이 탐색돼야만 한다. 필자가 선제적 재정투입을 주장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국민연금이 강제가입 제도이므로 국가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옳다는 개인적인 가치관에 기반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자동조정장치 도입을 통한 연금급여 소급삭감보다는 사회적 합의가 더 쉬울 것이라는 인식이다. 다만 이는 필자 개인의 의견일 뿐,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이 기수급자와 미래세대를 포함하여 급여를 삭감하는 자동조정장치 도입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라면 그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옳다. 합의가 되지 않아 구조개혁이 늦어진다면 그 부담은 오롯히 미래세대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1343 개혁의 평가는 구조개혁 논의가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달려있다. 자동조정장치 도입이든 선제적 국고투입이든,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고 미적립부채를 해소한다면 1343은 성공한 개혁이 된다. 하지만 ‘2007년 체제’를 극복하지 않고 과거 18년 동안의 논쟁을 반복하는 현실과 괴리된 이념적 논쟁이 지속된다면 젊은 세대의 불안은 현실이 된다. 선택은 우리 몫이다. 김우창 카이스트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김우창 교수는_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영과학 및 금융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 카이스트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현재 카이스트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SSCI 국제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한국투자신탁운용 사외이사, 제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민간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연구분야는 금융공학, 인공지능, 최적화다.

2025.04.13 10:00

9분 소요
지방 로스쿨도 서울 쏠림…지역인재는 어디에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5학년도 전국 22개 로스쿨 합격자 중 서울권 대학 출신 비율이 83.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지방 소재 로스쿨의 합격자들조차 77.7%가 서울권 대학 출신으로 확인되면서, 로스쿨 입시에서 출신 대학 브랜드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이른바 ‘SKY’ 출신은 전국 로스쿨 합격자 중 무려 55.4%를 차지했다. 대학별로 보면 서울대가 22.3%, 고려대 17.2%, 연세대 15.8% 순이다. 여기에 성균관대(6.9%), 경찰대(4.4%), 이화여대(4.3%), 한양대(3.6%), 중앙대(2.8%), 서강대(2.5%), 경희대(2.2%)를 더한 상위 10개 대학의 비중은 전체 합격자의 82.0%에 달한다.지방 로스쿨 합격자조차 서울권 대학 중심지방권에 위치한 로스쿨 8개 대학의 합격자 출신 대학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서울권 대학 강세는 두드러졌다. 고려대 출신이 15.2%로 가장 많았고, 연세대(14.1%), 성균관대(8.8%), 서울대(7.2%), 한양대(7.2%), 이화여대(6.7%) 등이 뒤를 이었다. 경찰대(5.4%), 서강대(4.0%)를 포함해 상위 10개 대학 출신이 지방 로스쿨 합격자의 74.9%를 차지했으며, 이 중 7곳은 모두 서울권 주요 대학이었다.전국 22개 로스쿨 합격자 중 지방 소재 대학 출신은 전북대(20명), 부산대(18명), 전남대(17명), 충남대(6명), 제주대(4명), 경북대(3명), 조선대(3명), 강원대(2명), 고려대 세종캠퍼스(2명), 국립경상대(2명) 등으로 매우 제한적인 수에 불과했다.서울대 로스쿨의 경우 합격자 156명 중 서울대 출신이 104명(66.7%)으로 압도적이었고, 연세대(12.2%), 고려대(9.6%)까지 포함하면 SKY 출신이 88.5%에 이른다. 연세대 로스쿨 역시 합격자 126명 중 연세대 출신이 56명(44.4%), 서울대가 49명(38.9%)으로, SKY 출신이 90.5%를 기록했다. 고려대 로스쿨도 합격자 121명 중 서울대가 49명(40.5%), 고려대 36명(29.8%), 연세대 11명(9.1%)로 SKY 출신이 79.3%에 달했다.이처럼 자교 중심의 로스쿨 합격 구조는 매년 반복되는 현상으로, 서울 주요 대학 중심의 로스쿨 선발 기조가 굳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인문계 우세 속 일부 자연계 전공자도 진출계열별 출신 현황을 보면, 연세대 합격자의 87.3%가 인문계, 고려대는 61.2%, 서울대는 76.9%로 인문계 출신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서울대의 경우 인문계 합격자 중 경제학과(17.9%), 정치외교학과(14.7%), 경영학과(14.1%) 순으로 비중이 높았으며, 자연계에서는 전기정보공학부, 수학과 등 소수의 학과에서 합격자를 배출했다.연세대도 경제학과(19.0%), 경영학과(18.3%)의 비중이 컸으며, 고려대는 경제학과와 사회학과가 각각 18.2%를 차지했다. 공학계열과 약학과 등 자연계 출신도 소수 존재하지만, 여전히 로스쿨 진학은 인문사회계 전공자 중심임이 확인된다.로스쿨은 법학적성시험(LEET)과 학부 성적 외에도 서류 평가, 면접 및 구술고사의 비중이 크다. 이 때문에 객관적인 시험 성적이 뛰어나더라도, 출신 대학의 ‘간판’이 합격 여부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로스쿨 입시에서 서류와 면접의 비중이 큰 만큼, 수험생들이 실질적인 역량 외에 대학 브랜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인문계 상위권 학생들이 학과보다는 대학 선택을 우선시하는 지원 패턴이 강화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25.04.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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