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법적 책임 우려에 떠는 기업과 이사회…정기 주총이 ‘분수령’
- [상법 개정 후폭풍 부나]②
재계 "책임 늘었으면 방어권도 필요"
투자자 "경영권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
[이코노미스트 이승훈 기자] 상법 개정이 시행 국면에 접어들면서 기업 이사회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이 전체 주주로 확대되고 집중투표제 의무화까지 예고되면서 경영진 중심이던 의사결정 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재계와 투자자 간 긴장감도 높아지는 모습이다. 오는 3월 정기 주주총회는 강화된 책임과 권한 속에서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향방을 가늠할 첫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책임 커진 이사회…명예직 시대 끝나나
지난 2025년 7월 국회를 통과한 1차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전체 주주’로 확대하고 전자주주총회 도입을 허용했다. 이어 8월 2차 개정에서는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가 포함되며 소액주주가 선택한 인사가 이사회에 진입할 가능성도 커졌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는 이사회에 소액주주의 진입 통로를 넓혀 지배주주 중심 구조를 완화하려는 장치로 평가된다. 그동안 경영진 결정을 추인하는 데 그쳤던 이사회 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지배구조 원리가 제도적으로 강화됐기 때문이다.
개정 상법은 소액주주 보호라는 진전을 가져왔지만 경영진과 이사들에게는 책임 확대라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사회 판단이 향후 주주대표소송이나 손해배상 청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전략적 투자나 구조개편 같은 고위험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이제 이사는 단순한 의결기구가 아니라 법적 책임을 직접 지는 자리”라며 “책임이 과도해지면 결국 의사결정이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책임 확대에 상응하는 제도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배임죄 개선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도입이다.
차등의결권은 일부 주식에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해 창업주나 경영진이 지분 희석 없이 장기 전략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반면 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 시 기존 주주에게 낮은 가격에 신주를 매입할 권리를 부여해 인수자의 지배력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방어 전략이다.
재계는 특히 업무상 배임죄 적용 범위가 넓어질 경우 실패한 경영 판단까지 형사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과감한 투자 결정이 줄어들 가능성을 우려한다.
한 대기업 임원은 “경영진에게 책임만 지우고 방어 수단을 막아두면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기업은 줄어들 것”이라며 “책임과 권한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투자자와 거버넌스 전문가들은 재계의 위기론이 과장됐다고 본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최근 열린 자사주 3차 상법개정 긴급좌담회에서 ‘경영권 안전장치 어불성설인 이유’라는 발표 자료를 통해 “경영권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라며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 방어 논리가 배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글로벌 시장에서는 경영진 권리보다 모든 주주의 이익 보호가 우선 원칙으로 작동한다고 강조했다.
적대적 인수 위협 역시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코스피200 기업의 약 93%가 평균 40% 이상의 지분을 가진 지배주주를 보유하고 있어 외부 세력이 경영권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구조라는 설명이다. 또한 주주총회 평균 참석률이 약 75%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최대주주는 50% 미만 지분으로도 이사회 선임을 좌우할 수 있어 이미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다.
차등의결권에 대해서도 우려가 나온다. 일부 주주가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 의결권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분리돼 사적 이익을 추구할 유인이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투자자 보호 장치가 충분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포이즌필 역시 만능 해법은 아니라는 평가다. 미국에서도 엄격한 이해충돌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예외적 장치일 뿐이며, 강압적 인수로부터 주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만 허용된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이를 도입하려면 충실의무 관련 판례 축적과 독립적인 이사회 구조 등 제도적 기반이 선행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올해 주총은 분기점…표 대결 가능성도
시장에서는 이번 정기 주총을 개정 상법 효과를 확인할 첫 무대로 보고 있다.
의결권 자문사 서스틴베스트는 최근 발간한 ‘2026 정기주주총회 시즌 프리뷰’ 보고서에서 올해 주총을 두고 “개정 상법이 실제 기업 지배구조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자리”라고 평가했다.
특히 이사회가 총주주의 이익을 고려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기능하고 있는지가 핵심 판단 기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집중투표 배제 조항 삭제 ▲독립이사 선임 비율 확대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 이사회 구조와 직결된 정관 변경 안건이 다수 상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법조계에서는 주주 간 충돌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구현주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는 최근 열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의 세미나 ‘개정 상법으로 달라질 주주총회, 기업의 우회전략 vs 일반주주의 대응 전략’에서 “올해 정기 주총 결과가 향후 일반주주의 이사회 진입 가능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며 “주주제안과 표 대결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배주주 측이 개정 상법 시행 전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의안을 발의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에 맞서 기관과 일반주주가 결집하면서 어느 때보다 뜨거운 주총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상법 개정 논쟁의 본질은 감시 강화와 경영 자율성 사이의 균형이다. 투자자 보호가 강화되지 않으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 저평가) 해소가 어렵고, 반대로 경영 안정성이 흔들리면 기업의 장기 투자 역시 위축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사회 권한을 어디까지 확대하고 경영진에게 어떤 수준의 방어 장치를 허용할 것인지가 한국 자본시장의 다음 과제가 될 것”이라며 “결국 핵심은 투자자 보호와 기업 경쟁력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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