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와인 포장 방식'이 바꾸는 글로벌 와인 산업의 재편 [홍미연의 와인 스토리:지(知)]
- “유리병을 넘어 박스로”…벌크·BIB가 흔드는 와인 시장
전통적 병입 와인과 ‘공존의 시대’ 열리나
그러나 글로벌 와인 시장의 무게중심은 조용히 이동하고 있다. 벌크 와인(Bulk Wine)과 백인박스(Bag-in-Box·BIB)를 중심으로 한 유통 구조의 재편이 그것이다. 이는 단순한 포장 방식 변화가 아니라, 물류·세제·환경 규제·유통 전략이 결합된 산업적 전환에 가깝다.
‘액체의 이동’이 만든 비용·탄소 절감 효과
벌크 와인은 병입 이전 단계의 원액을 플렉시탱크(Flexitank) 등 대형 컨테이너에 담아 운송한 뒤, 도착지에서 병입하거나 BIB·캔 등으로 재포장하는 방식이다. 약 2만4000리터를 실을 수 있는 플렉시탱크는 병 와인 대비 적재 효율을 2.4~3배 높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물류비 절감과 함께 단위당 탄소 배출량 감소로 이어진다. 업계에서는 완제품 병입 수입 대비 탄소 배출량이 40% 이상 줄어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ESG 경영이 글로벌 유통사의 핵심 지표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벌크 모델은 전략적 선택지로 부상하고 있다.
세제 구조 역시 변수다. 종량세 체계를 적용하는 국가에서는 병과 포장재를 제외한 원액 기준 과세가 가능해 비용 구조에 영향을 준다. 인도는 완제품 수입에 최대 150% 수준의 고율 관세를 적용하는 반면, 벌크 원액 수입 후 현지 병입에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세율을 적용한다. 브라질·베트남 역시 자국 병입 산업 보호를 위해 벌크 수입에 낮은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한국은 한·EU(유럽연합) FTA(자유무역협정) 이후 병입 와인 관세가 상당 부분 인하됐지만, 주세·교육세 등 리터당 과세 체계가 유지되고 있다. 일부 수입사들이 벌크 원액을 들여와 국내 병입을 병행하는 이유도 재고 관리와 유통 마진 조정, 물류 효율성 확보에 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전시 산업의 선택
벌크 와인을 저가 시장의 전유물로 보던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프랑스 전시기업 코멕스포지움(Comexposium)은 2017년 암스테르담의 월드 벌크 와인 전시회(WBWE)를 인수했다. 이는 벌크 거래가 이미 독립적 시장 규모와 지속성을 확보했음을 보여준다.
2020년에는 전통적 프리미엄 박람회 ‘비넥스포’(Vinexpo)와 코멕스포지움이 합작해 ‘비넥스포지움’(Vinexposium)을 출범시켰다. 프리미엄 병입 중심 행사와 대량 거래 플랫폼을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묶은 전략적 통합이다. 벌크가 더 이상 주변적 거래 방식이 아님을 상징한다.
품평회 영역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프랑스 양조학자 연맹이 주관하는 ‘비날리 인터내셔널’(Vinalies Internationales)은 BIB 전문 대회인 ‘CIWIB’(Concours International Wine In Box)를 인수했다. 과거 샤토 무통 로칠드, 돔 페리뇽의 양조 책임자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권위 있는 대회가 BIB를 공식 카테고리로 편입한 것이다.
이는 BIB가 단순히 가격 중심의 대안적 포장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전제로 논의되는 유통 형태로 제도권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용기의 전통성보다는 내용물의 완성도에 보다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러한 변화는 와인 산업의 관심이 생산자 중심의 권위에서 소비 편의와 유통 효율성으로 점차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뒤에는 12년 전 국제 박스 와인 품평회(CIWIB)를 창립한 안 마리 에스탐프(Anne Marie Estampe)의 지속적인 시도가 있었다. 10여 년 전, 대형 와인 전시회에서 BIB의 잠재력을 주장하는 일은 업계의 공감대를 얻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전통을 훼손하는 시도로 받아들였고, ‘마담 빕(Madame Bib)’이라는 별칭이 따라붙을 정도로 냉소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패키징을 가격이 아닌 구조적 효율성과 소비 접근성의 문제로 바라보며 논의를 이어갔다.
그 이후 CIWIB는 2024년 400개 출품작을 기록했고, 2025년에도 14개국 332개 샘플이 접수됐다. 시장 위축 국면에서도 일정 수준의 참여가 유지됐다는 점은 BIB 세그먼트의 독립적 성장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같은 변화는 BIB가 ‘비날리 인터내셔널’의 공식 카테고리로 편입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무알코올·저알코올 와인과 함께, BIB 역시 현대 와인 시장에서 하나의 실용적 선택지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CIWIB가 베스트디자인을 별도 심사 항목으로 다룬다는 점은 BIB 시장의 성격 변화를 보여준다. 포장 효율성 중심이던 경쟁 구도가 디자인, 브랜드 이미지, 친환경 소재 활용 등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BIB가 단순 유통 수단이 아니라 소비 접점에서 차별화 요소로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BIB의 산소 차단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의 숙성이 필요한 고연산 빈티지 와인에서 유리병이 갖는 안정성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통 주기가 짧은 데일리 와인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스웨덴의 시스템볼라겟(Systembolaget)과 노르웨이의 빈모노폴레(Vinmonopolet) 등 국영 주류 독점 기업들의 공식 데이터에 따르면, 이들 국가의 와인 소비량 중 50% 이상은 이미 BIB 형태로 유통되고 있다. 이는 정부 주도의 엄격한 탄소 중립 정책과 실용주의적 소비 문화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구조적 전환의 결과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신대륙의 프리미엄 생산자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있다. 캘리포니아 파소 로블스의 선구적 와이너리인 타블라스 크릭(Tablas Creek)은 자사의 고품질 와인을 BIB로 출시하며, 유리병 대비 탄소 배출량을 84% 절감했다는 분석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BIB의 확장성
1인 가구 증가와 홈술 트렌드 확산 속에서 BIB는 실용적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진공 설계된 내부 백 구조 덕분에 개봉 후에도 최대 6주간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데일리 와인 시장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최근에는 디자인·브랜드 이미지·친환경 소재 경쟁까지 더해지며 차별화 요소로 진화하고 있다.
물론 BIB가 장기 숙성이 필요한 고연산 빈티지 와인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복합 소재 내부 백의 재활용 문제 역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운송 효율 ▲경량 포장 ▲탄소 감축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BIB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통적 병입 와인이 ‘시간의 가치’를 상징한다면, 벌크와 BIB는 ‘이동의 효율성’을 상징한다. 유리병을 넘어 박스로 향하는 변화는, 와인을 소비하는 방식이 점진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산업적 신호일지도 모른다.
홍미연 씨엠비 와인앤스피리츠 C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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