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성수동은 '공장'이 아니라 '골목'이 만들었다 [스페셜리스트 뷰]
- 지역에 필요한 것은 산업을 만드는 도시
낡은 건물과 골목이 만든 브랜드 생태계
지역소멸 시대, 도시가 먼저라는 역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 불균형은 오히려 악화됐다. 수도권은 국토 면적 11.8%에 인구 50.6%, 국내총생산(GDP) 53%가 집중됐다. 229개 기초지자체 중 141곳(61.5%)이 소멸 위험에 처했다. 공공기관 이전으로 조성된 혁신도시는 주말마다 직원들이 수도권 집으로 돌아가 상권조차 형성되지 않는 유령도시라는 오명을 얻었다.
왜 실패했는가. 지역 정책이 산업을 유치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정작 산업이 자생적으로 탄생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데는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 안에서 만들어진다. 60년 지역 정책의 실패는 산업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도시 정책의 실패다.
청년들이 서울을 떠나지 않는 이유도 일자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자리가 있어도 살고 싶지 않은 도시라면 청년은 머물지 않는다. 서울은 살고 싶은 동네를 압도적으로 많이 보유한 도시다. 미국 도시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이 현상을 ‘일자리가 사람을 따라간다’고 정식화했다. 창조적 인재는 먼저 살고 싶은 도시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일자리를 만든다. 지방이 이 격차를 좁히려면 일자리 유치보다 살고 싶은 동네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 산업을 탄생시키는 환경
그렇다면 산업을 만드는 도시란 어떤 도시인가. 1961년 미국 도시 활동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이 질문에 답했다. 도시의 다양성과 혁신은 산업 유치가 아니라 도시 환경 자체에서 나온다. 제이콥스의 도시는 사람과 기업이 자발적으로 모여 새로운 산업과 문화를 창조하는 환경이다. 기존 기업을 수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기업을 탄생시키는 공간이다.
제이콥스는 이 환경의 물리적 조건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복합용도 ▲짧은 블록 ▲충분한 밀도, 그리고 ▲오래된 건물이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와 보스턴 노스엔드 같이 활력 있는 도시 지역을 귀납적으로 관찰한 결과다.
처음 세 조건은 유동인구를 만드는 수요 측면의 조건이다. 복합용도란 주거·상업·업무·창작이 한 블록 안에 뒤섞인 상태다.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다양한 이유로 같은 거리를 오가게 만든다. 짧은 블록은 보행자가 골목을 가로질러 이동할 수 있게 해 우연한 만남과 발견을 늘린다. 충분한 밀도는 거리에 항상 사람이 있게 만들고, 그 사람들이 곧 서로의 소비자가 된다. 이 세 조건이 갖춰진 거리는 특별한 목적 없이도 걷고 싶어지는 곳이 된다.
네 번째 조건, 오래된 건물은 공급 측면의 조건이다. 신축 건물은 자본 회수 비용이 높아 소규모 실험적 창업자를 수용하지 못한다. 프랜차이즈와 표준화된 고회전 업종만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다. 오래된 건물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소규모 창업자에게 문을 열어준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검증되기 전까지 수익을 내기 어렵고, 그 실험의 기간을 버텨낼 유일한 조건이 낮은 임대료다.
네 조건이 함께 작동할 때 도시는 소규모 기업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환경이 된다. 전면적인 재개발은 이 네 조건을 한순간에 해체한다. 고밀도·슈퍼블록·단일 용도·신축 고층 건물로 채워진 도시는 유동인구를 줄이고 임대료를 높이며 소규모 건물의 공간 기획 가능성을 소멸시킨다. 브랜드를 잉태하는 골목은 사라지고 브랜드를 소비하는 거리만 남는다.
크리에이터 타운: 골목상권의 현대적 정식화
2000년대 이후 소상공인 브랜드 생태계로 성장한 성수동·홍대·이태원·연남동·연희동 등 서울의 골목상권이 바로 제이콥스 도시다. 정부가 설계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크리에이터와 소상공인이 낡은 건물과 좁은 골목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 낸 산업 생태계다.
연희동도 마찬가지다. 단독주택과 저층 건물이 밀집한 주거 동네에 2003년 제니스커피하우스를 시작으로 카페가 들어오고, 노아스로스팅·폴앤폴리나 같은 로컬 카페와 베이커리와 유어마인드 같은 독립 서점이 뒤를 이으며 동네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건축 사무소 쿠움파트너스가 단독주택 재생 건축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낡은 주택을 주거와 상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전환했다.
지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대전 성심당은 원도심 오래된 건물에서 시작해 지역 경제의 앵커로서 대전의 베이커리 산업을 견인한다. 강릉 테라로사와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는 명주동의 소규모 건축 환경 위에서 커피 산업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래된 건물과 소규모 건축물이 모인 동네라는 점이다. 제이콥스의 조건이 자연적으로 보존된 곳에서 산업이 탄생했다.
지역발전에서 중요한 것은 성수동·이태원·홍대 등 골목상권 중 일부가 소비 공간을 넘어 산업을 잉태하는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크리에이터 타운은 도시 콘텐츠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를 자체적으로 육성하는 도시 지역이다. 이 단계에서 골목상권은 브랜드 생태계·콘텐츠 생산지, 그리고 직주락(職住樂) 센터의 복합 플랫폼이 된다.
이 전환을 주도하는 업종은 코워킹스페이스·메이커스페이스·복합문화공간 등 크리에이터들에게 업무와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의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공간이다. 성수동의 헤이그라운드는 소셜벤처와 스타트업이 입주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코워킹스페이스로, 이 동네가 단순 카페 상권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연희동의 어반플레이 연남장은 독립 브랜드와 크리에이터들이 팝업 스토어와 전시를 열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동네의 콘텐츠 밀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크리에이터 타운의 형성에는 세 축이 필요하다. 첫째는 건축 환경이다. ▲저층 ▲오래된 건축물 ▲걷기 좋은 골목 ▲소규모 건물이 기반이다. 둘째는 콘텐츠와 브랜드다. 편집숍·카페·서점·공방 같은 독립 로컬 브랜드가 집적되어야 한다. 셋째는 크리에이터와 커뮤니티다. 예술가·공간 창업자·소셜벤처 같은 크리에이터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고 머무를 수 있는 생태계가 있어야 한다. 이 세 축 중 건축 환경이 선행 조건이다. 크리에이터가 모이고 브랜드가 탄생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환경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지역 소도시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
크리에이터 타운의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서울과 지방 모두에서 핵심 공약으로 등장했다. 당시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서울형 브랜드 상권 육성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서울 상권 20곳을 ‘제2의 성수동’으로 육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전남·광주에서는 민형배 후보가 ‘글로컬 타운 30곳 조성’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27개 시군구 원도심을 대상으로 성수동 모델을 지역 여건에 맞게 재설계해 적용한다는 구상이다.
두 공약은 크리에이터 타운이 더 이상 특정 지역의 자생적 현상이 아니라 도시 정책의 핵심 의제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제이콥스 도시의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 창작 거점을 만들어도 공간만 생길 뿐 생태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이 자생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가지 조건의 결핍 때문이다.
첫째, 건축 환경의 파괴다. 지방 원도심은 1970~80년대 개발 과정에서 오래된 저층 건물들이 대거 철거되고 신축 상가와 아파트로 대체됐다. 남은 오래된 건물들도 재개발 압력과 공실 증가로 방치되고 있다. 제이콥스가 말한 공급 조건, 즉 낮은 임대료의 오래된 건물과 공간 기획이 가능한 소규모 건물의 집적이 해체된 것이다.
둘째, 크리에이터 공급의 부재다. 서울의 크리에이터 타운은 홍대 미술대학, 이태원 외국인 커뮤니티, 성수동 한양대와 소셜벤처 커뮤니티처럼 크리에이터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로컬 스쿨과 커뮤니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방 소도시에는 이 역할을 하는 학교와 커뮤니티 생태계가 없다. 창업을 시도하려는 청년이 있어도 기술을 배우고 실험할 공간이 없고, 협력할 동료가 없다.
셋째, 지역 고유 자원의 브랜드화 실패다. 지방 소도시는 서울에 없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한옥·적산가옥·전통 공예·농수산물·역사 유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자원들은 관광 상품으로 소비될 뿐 로컬 브랜드의 원천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 보성의 차, 담양의 대나무, 강진의 도자기가 지역 크리에이터의 창작 기반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지방 소도시의 상권은 서울과 똑같은 프랜차이즈로 채워지고, 지역만의 정체성을 잃는다.
로컬 브랜딩 전략: 건축마을과 로컬 메이커스페이스
지역에서 이 세 가지 결핍을 동시에 해소하는 전략이 건축마을과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다. 건축마을은 크리에이터를 유인하는 물리적 환경을 만드는 전략이다. 한옥·적산가옥·단독주택이 밀집한 원도심형 건축마을은 이미 제이콥스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구역별 건축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건물주에게 설계비와 공사비를 지원해 가로의 역사성과 스케일을 보존하면서 신개축을 유도한다.
실제 정책 사례로는 서울시의 휴먼타운 2.0을 들 수 있다. 노후 저층 주거지를 전면 철거하지 않고 개별 건물 단위로 신축·리모델링을 지원하되, 용적률·건폐율 완화와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결합해 동네의 스케일과 가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개별 건축 지원이 축적되면 동네 단위의 건축 환경 재생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이 모델을 지방 원도심에 적용할 때 건축마을이 된다.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는 크리에이터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로컬 스쿨이다. 핵심 원칙은 신설이 아닌 기존 시설의 연계다.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목공방·제빵학교·도예 공방·양조장 같은 시설들을 연결해 지역 고유 자원 특화 공동 작업장을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의 제3의 장소(Tiers-Lieux) 프로그램은 2023년 기준 3000개소가 운영되며, 각 지역의 온실·양조장·철공소 같은 기존 시설을 공공 지원과 민간 운영으로 결합해 3년 내 자립하는 모델을 정착시켰다.
전남·광주에 적용한다면 보성은 차·도예 공방, 담양은 대나무 공예, 강진은 도자기 스튜디오, 순천은 정원학교처럼 각 지역 자원에 특화한 메이커스페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
건축마을과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는 분리될 수 없다. 건축마을이 크리에이터를 유인하는 공간을 만들고, 로컬 메이커스페이스가 그 공간을 채울 크리에이터를 키운다. 두 전략이 결합할 때 비로소 지역 소도시에서도 크리에이터 타운이 형성될 수 있다.
결론: 도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제이콥스가 1961년에 보여준 것은 산업이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산업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건물, 소규모 건물, 그것들이 모여 형성한 분업 생태계는 낙후의 흔적이 아니라 혁신의 토양이다. 지역이 자체적인 산업을 원한다면 산업단지를 먼저 만들 것이 아니라 도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지방 소도시에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청년이 살고 싶어 할 동네 하나를 먼저 만들어라. 일자리는 살고 싶은 동네가 만들어진 다음에 따라온다.
로컬 브랜딩은 이 과정을 전략화한 개념이다. 잠재력 있는 동네에 그 지역 고유의 컨셉으로 공간과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 그 동네가 성수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네만의 무언가가 되는 것. 그것이 지역 경쟁력의 출발점이다.
제이콥스가 1961년에 경고했던 실수를 60년 후의 한국이 반복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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