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의 촉감 처방전]②
상담 대신 선택한 ‘초가성비 처방전’…현실 도피의 ‘회피성 대처’ 경고
정신과 전문의 “만성 무력감 달래는 ‘적응적 퇴행’ 현상”
[이코노미스트 권지예 기자]
“왁뿌볼을 깨는 행위에 쾌감이 있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다. 회사에 왁뿌볼을 두고 보이면 누른다. 부서지는 소리에서도 ASMR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 경기도 하남시에 사는 김민경씨(34)는 요즘 ‘왁뿌볼’에 푹 빠져있다.
촉감 완구인 ‘왁뿌볼’에 열광하는 2030 세대. 왁뿌볼이란 왁스로 코팅한 겉면을 손으로 눌렀을 때 바삭하게 깨지는 듯한 촉감과 소리를 즐기는 완구다. 아이들이 아닌 이 어른들은 왜 ‘만지는 장난감’에 왜 지갑을 열까. 말랑이를 주무르거나 왁뿌볼을 부수는 행위는 오직 ‘손끝의 촉각’에만 주의를 집중시켜 불안을 유발하는 잡념 회로를 잠시 끄는 인지적 주의 분산 효과를 준다는 게 의학적 소견이다. 단돈 3000원으로 얻는 가장 가성비 높은 정신과적 ‘처방전’인 셈이다. 더불어 취업·경제적 압박 등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을 100% 내 통제권 안에서 파괴·변형할 수 있는 완구를 통해 해소하는 심리도 작용한다.
최혜지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2030 세대의 반복적인 촉각 행동과 소비 심리에 대해 물었다.
‘손끝의 마음챙김’과 통제감의 회복
왁뿌볼을 무의식적으로 주무르는 행동은 역시 스트레스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최 교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의 긴장 스위치(교감신경계)가 켜지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근육이 굳으며, 머릿속으로는 걱정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하는 ‘반추적 사고’가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때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만지면 위협적인 생각에 쏠려 있던 주의가 즉각 손끝의 감각으로 분산되며 걱정의 고리를 일시적으로 끊어내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 과정은 오감, 특히 촉각에 주의를 고정하는 행위 자체가 오롯이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원리다. 정신의학에서 불안을 가라앉힐 때 쓰는 ‘그라운딩’(신체 감각에 집중해 주의를 돌리는 기법)과 유사하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판단을 멈추고 감각을 받아들이는 ‘마음챙김’과 기능적으로 닮아 있다는 분석이다.
나아가 촉감 완구를 파괴하고 변형하는 행위는 심리적 통제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최 교수는 “스트레스가 심한 이유는 대개 내 마음대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통제 불가능성’ 때문인데, 장난감을 만지는 동작은 내가 힘을 주는 대로 항상 일정한 결과와 촉감이 예측 가능하다”며 “내가 행동한 대로 결과가 확실하게 나오는 자극을 통해 현실 스트레스로 바닥난 내 삶의 주도권과 통제감을 미약하게나마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짚었다. 완구를 입맛대로 DIY 열풍 역시 ‘내 손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개인적 효능감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시도와 궤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복적인 촉각 행동을 정상적인 행동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마음이 아프다는 신호일까. 최 교수는 이를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그는 “다리를 떨거나 펜을 돌리는 행동은 긴장된 상황에서 스스로 뇌의 과열을 식히기 위해 본능적으로 나오는 정상적인 자기조절행동”이라면서도, “다만 그 행동이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너무 자주, 너무 강하게 나타나거나 스스로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강박적이라면 불안장애나 강박증·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등의 신호일 수 있으므로 전문가의 평가가 필요하다”고 단서를 달았다. 단순히 장난감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병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3000원짜리 처방전’ 인기의 이유
왁뿌볼을 부수는 등의 행동이 2030 사이에 쉽게 번진 데는 접근성이 높은 탓이 크다. 비용은 물론 따로 사용법을 배울 필요 없이 즉시 할 수 있다.
촉감놀이 완구는 최근 편의점·생활용품점 등까지 확대되며 구매가 쉬워졌다. 다이소의 경우 이미 말랑이·크런치 슬랑이 등을 직접 만드는 재료 구매처로 각광받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지그재그에서는 지난 6월 14~7월 12일 기준 촉감놀이 상품인 슬랑이·왁뿌볼 거래액이 직전 월 대비 무려 774%, 500%씩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최 교수는 “이미 스트레스로 지쳐 생각할 힘조차 없는 번아웃 상태의 청년들에게 접근성이 매우 높은 건 사실”이라면서도 “효과는 일시적인 진정에 그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에너지가 고갈된 2030 세대에게는 에너지가 덜 드는 3000원짜리 장난감이 즉각적인 선택지가 되고 있는 셈이다.
과거 어린이들의 전유물이었던 완구가 성인의 주류 문화가 된 배경에는 청년들이 처한 팍팍한 사회적 환경이 있다. 2030 세대는 ▲고용불안 ▲취업난 ▲자산 양극화 등 노력해도 상황을 바꾸기 힘든 만성적 무력감에 노출돼 있다. 성인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 부담에서 잠시 벗어나 아무 걱정 없던 어린 시절의 감각적 안정감으로 돌아가 숨을 고르는 ‘적응적 퇴행’ 현상의 일환이라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동시에 지극히 가성비를 따진 현실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정신과 상담이나 여행처럼 큰돈과 시간이 드는 자기돌봄은 문턱이 높은 반면, 촉감 장난감은 소액으로 즉시 마음의 위안을 준다는 점에서 제한된 상황 속 청년들이 선택한 최적의 생존 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촉감 처방전’이 가진 중독성과 위험성에 대해 뼈아픈 경고도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불안을 가라앉히는 응급 완충제로는 훌륭하지만, 업무 스트레스나 진로 불안 같은 현실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최 교수는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풀어야 할 때도 계속 장난감만 만지며 도피한다면 문제를 피하는 ‘회피성 대처’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며 “불안한 감정만 일시적으로 마취시킬 뿐 원인은 사라지지 않고 쌓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마음의 번아웃이 더 심해지거나 현실의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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