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네릭 구조조정] ②
규제 불확실성·재무 부담에 신약 개발보다 생존 우선
원료·제형 기술 활용…뷰티·건기식으로 수익원 다변화
[이코노미스트 권지예 기자] 정부가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신약 개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핵심은 ‘혁신형 제약기업’의 연구개발(R&D) 인증 요건 상향이다.
하지만 제약 업계의 기류는 냉담하다. 신약 투자 확대라는 정면 돌파 대신, 제도 참여 포기와 사업 다각화가 가속하는 모양새다. 자체 R&D 자금 조달 능력이 부족한 중소 제약사들은 혁신형 기업 지정을 사실상 고려하지 않는 분위기다. 대신 화장품·건강기능식품 등 비(非)의약품이나 유통 영역으로 사업 축을 옮기거나 영업 역량에 투자하겠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인증 실익 따지는 중소 제약사
보건복지부는 최근 ‘제약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및 관련 고시 개정을 통해 혁신형 제약기업의 R&D 비용 비중 요건을 개편했다. 직전 3개 연도 평균 매출액 1000억원 미만 중소 제약기업의 R&D 비율 기준은 기존 7%(최소 50억원)에서 9%(최소 70억원)로, 매출 1000억원 이상 기업은 5%에서 7%로 각각 상향됐다.
제약 업계에서는 이번 개정으로 중소 제약사들이 약가 우대 혜택을 얻기 위해 감수해야 할 재무적 부담이 커지면서, 인증 자체를 포기하는 경향이 강화될 것으로 본다.
중소 제약사 관계자 A씨는 “매년 70억원의 현금을 손익계산서상 비용으로 처리할 경우 당장 영업 적자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며 “당장 약가 가산 우대 효과보다 재무 리스크가 더 커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신약 개발사 관계자 B씨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10년 안팎이 걸린다고 본다”며 “정부 요구대로면 최소 700억원을 투자해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길을 가야 하는데, 이를 정부가 추진하라고 해서 따라갈 수 있는 제약사는 대기업을 제외하고 거의 없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도 우리나라 분위기상 녹록지 않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레퍼런스를 가져오라는 식이고, 행정적 과정이 선진국과 딴판이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바이오 선진국인 미국의 경우 식품의약국(FDA)을 중심으로 개발 초기부터 임상 설계와 데이터 제출을 지원하는 패스트트랙 및 수시 동반 심사 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위험도가 낮은 임상 1상 단계에서는 행정 서류 절차를 과감히 간소화하거나 기관윤리위원회(IRB) 검토 기반의 임상 승인 경로를 신설하는 등 규제 프레임워크 자체가 신약의 시장 진입 속도를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약 개발 실패에 따른 리스크를 기업 혼자 짊어지게 하는 구조가 아니라, 행정 자문과 예측 가능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규제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식약처 역시 글로벌 혁신제품 신속심사 지원체계(GIFT) 등을 도입하며 한국형 패스트트랙 조성을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팬데믹 당시 신속 허가 과정에서 불거진 감사원 감사와 국회 국정감사의 '특혜·안전성 논란'을 거치며 행정 당국의 심사 기조는 극도로 보수화됐다.
신속 심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이 공무원 개개인에게 집중되는 구조 속에서, 당국이 면책을 받기 위해 해외 레퍼런스와 과도한 보완 자료를 요구하는 보신주의 행정으로 움츠러들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B씨는 국내 중소 제약사들의 고질적인 세습 경영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제네릭은 공개된 자료를 기반으로 화학적 조합이 이뤄지면 만들 수 있어 접근성이 좋은 영역”이라며 “이 시장에서 부를 축적해 온 기업들은 지분 승계와 안정적인 지배력 유지가 최우선 과제”라고 귀띔했다.
국내 제네릭 전문 제약사들이 안주해 온 구조적 한계가 신약 개발 환경을 저해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1980~1990년대 복제약 대량 생산으로 부를 축적한 상당수 국내 중소 제약사는 현재 2·3세 경영 체제에 접어들었다.
이들 경영진은 위험 요소가 크고 장기적 투자가 필요한 신약 개발보다는, 오리지널 의약품 특허 만료에 맞춰 복제약을 신속히 시장에 내놓고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챙기는 '천수답식 경영'을 유지해 왔다. 수백억원의 현금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해 당기순이익을 깎아 먹는 신약 개발은 경영진 입장에서 선택하기 어려운 카드라는 얘기다.
성공 사례 쌓이는 더마 화장품·건기식
보건당국의 제네릭 약가 인하 추진과 R&D 요건 강화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제약사들은 정부 약가 통제가 미치지 않는 비(非)의약품 영역으로 사업 구조를 전환하는 경향이 심화할 것으로도 봤다.
의약품 부문은 정부의 약가 규제와 건강보험 재정 여건에 따라 수익성이 변동하지만,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 등 일반 소비재는 가격 설정과 마케팅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제약 업계 관계자는 “약가 인하에 따른 수익성 하락을 보완하기 위해 신약 투자보다는 화장품·건기식 등 비제약 부문으로 진출하거나, 기존 신사업으로 추진하던 비제약 부문의 마케팅 구조를 확대하는 움직임이 늘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제약사들은 의약품 생산에서 축적한 원료 배합 기술과 검증된 성분 연구를 비의약품 부문으로 확장하고 있다. 동국제약의 경우 상처 치료제 원료 성분을 기반으로 한 화장품 브랜드 '센텔리안24'를 성공시키며 헬스케어 사업을 핵심 수익원으로 안착시킨 대표적 사례다.
흉터 치료제 원료 성분을 응용해 더마 화장품 '파티온'을 성공시킨 동아제약이나, 피부과 의약품 제제 기술과 유통망을 활용해 더마 화장품 '셀블룸'을 선보인 동구바이오제약, 히알루론산 주사제 원료 기술을 응용해 '더마 엘라비에'를 선보인 휴온스 역시 같은 맥락이다.
대원제약의 '대원헬스', 삼진제약의 '위시헬씨' 등은 제약 인프라를 활용해 건강기능식품 브랜드를 론칭하며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사업 전략을 펼치고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제네릭 생산으로 축적된 원료 노하우와 피부 침투 제제 기술은 화장품 개발에 이식하기 쉬운 강력한 무기가 된다”며 “기업은 수익성이 확보되는 사업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아직 신약 개발에 있어 국내 기술과 인프라는 바이오 선진국에 비해 한계가 명확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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