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은행이 농산물·전기까지 판다…日 금산분리 ‘빗장' 어떻게 열었나
- [금산분리, 누구를 위한 벽인가]②
일본은 은행 고도화·지역 활성화 땐 자회사 허용
미국은 ‘보완성’ 기준 예외…영국은 감독·실험으로 관리
[이코노미스트 김윤주 기자] 은행이 농산물을 팔고, 재생에너지를 발전해 기업에 전력도 공급한다. 이는 일본 은행의 얘기다. 대출과 예금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일본 은행들은 별도 자회사를 통해 다양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외 주요국은 금융과 산업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지는 않으면서도 은행이 신사업을 키울 수 있는 예외 통로를 마련해뒀다. 일본은 은행업 고도화와 지역 활성화라는 사업 목적을, 미국은 금융과의 ‘보완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K-금융도 금산분리를 풀지 말지의 이분법을 넘어 어떤 사업을 어떤 조건 아래 허용할지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 ‘은행업 고도화’라면 자회사 허용
일본은 2016년 은행법 개정을 통해 ‘은행업 고도화 등 회사’ 제도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정보기술 등을 활용해 은행업을 고도화하거나 이용자 편의를 높이는 사업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후 2018년 지역 특산품의 판로를 개척하는 지역상사를 포함했고, 2021년에는 지역경제 활성화·기업 생산성 향상·지속가능한 사회 조성에 기여하는 사업까지 범위를 넓혔다.
핵심은 비금융 자회사 설립을 포괄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니라, 은행업과의 연관성과 공익적 효과를 입증한 사업에 별도 통로를 냈다는 데 있다. 일본 금융청은 인가 과정에서 ▲비금융 사업의 위험이 은행으로 번질 가능성 ▲계열사 간 이해상충 ▲은행의 우월적 지위 남용 우려 등을 함께 심사한다.
일본 은행들은 이 제도를 통해 지역상사·농업·데이터·전자계약·탄소배출량 관리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일본의 대형은행인 SMBC는 전자계약과 탄소배출량 측정 관련 사업에, 미야자키은행은 농업법인 설립에 나섰다.
일본의 지방은행인 산음합동은행은 2022년 재생에너지 발전 자회사 ‘고긴에너지’를 설립했다. 거래처 공장과 건물 지붕에 태양광 설비를 설치하고, 기업이 생산 전력을 구매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친환경 대출을 늘린 것이 아니라, 은행이 별도 법인을 통해 발전 설비를 설치·운영하는 사업자로 들어간 사례다.
미국은 ‘보완성’ 기준으로 예외 열어
미국은 금융과 상업의 분리를 원칙으로 유지하면서도, 1999년 금융현대화법(GLBA)을 통해 일정 요건을 갖춘 은행지주회사가 금융지주회사(FHC) 지위를 선택하면 업무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했다. 은행과 지주회사가 충분한 자본과 경영 건전성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융업과의 보완성을 인정하고 금융시스템의 안전성과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금융과 직접 맞닿지 않은 실물자산 거래·보유 등도 예외적으로 가능하다. 다만 이 역시 무제한 허용은 아니다. Fed는 자본 적정성·위험 집중·이해상충·소비자 보호 등을 고려해 조건을 부과하고 지속적으로 감독한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한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는 물리적 상품과 에너지 시장 관련 사업을 이어갔다. 석유·천연가스·금속 등 실물자산의 거래와 보유는 금융회사의 비금융 사업 범위를 둘러싼 논쟁거리 였다. 미국 사례는 금산분리의 핵심이 ‘전면 금지’보다 허용 사업의 금융과의 보완성, 그리고 위험 관리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은 건전성감독청(PRA)의 그룹 단위 건전성 감독과 금융감독청(FCA)의 인가 체계를 중심으로 금융·비금융 결합을 관리한다. 은행의 비규제 사업은 데이터 처리 등 본업에 부수적인 활동이 중심이지만, FCA의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금융과 기술이 결합한 서비스는 제한된 고객과 기간 안에서 시험할 수 있다. 샌드박스는 법 적용을 통째로 면제하는 장치가 아니다. 사업자가 소비자 보호·자금세탁 방지·정보보호·운영 위험 관리 체계를 갖췄는지 실제 시장에서 검증하는 절차다.
단계적 허용이 핵심…K-금융 확장의 과제
해외 사례는 금산분리를 완화한다고 해서 금융회사의 모든 비금융 사업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일본은 은행업 고도화나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사업인지 따져 자회사 설립을 인가하고, 미국은 금융 활동을 보완하는 사업인지와 건전성 요건을 심사한다. 영국도 그룹 단위 건전성 감독과 인가·샌드박스 체계 안에서 사업 위험과 소비자 보호 장치를 검증한다.
해외 금산분리의 공통점은 허용 범위를 정하고, 비금융 사업의 위험이 은행으로 번지지 않도록 관리한다는 데 있다. 한국도 비금융 진출을 일률적으로 막거나 전면 허용하는 대신 금융과의 연관성과 위험 전이 가능성, 소비자 보호 수준에 따라 단계적으로 문을 여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김혜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금산분리 규제 완화와 일본은행들의 비금융 비즈니스 진출’ 보고서에서 일본처럼 은행의 디지털 전환과 사회적 기여에 도움이 되는 비금융 자회사는 허용하되, 위험 전이 가능성이 낮은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넓혀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연구위원은 “국내 은행도 금융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비금융업무를 자회사 대상에 추가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의 은행업고도화등 회사처럼 특정 업종을 열거하기보다 디지털 전환이나 사회적 기여라는 운영 취지를 기준으로 예외를 설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김 연구위원은 “비금융업 리스크의 전염 가능성이 낮은 사업영역을 중심으로 허용 범위를 정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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