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출근은 내 맘대로, 퇴직금은 사장 책임?…악마의 증명에 갇힌 ‘근로자 추정제’
- [870만 보호법인가, 골목상권 청구서인가]⑤
획일적 이분법 규제로 흔들리는 긱노동자
“졸속 입법 대신 정교한 매뉴얼 마련해야”
[이코노미스트 정길준 기자]
#학원장 A씨는 최근 퇴사한 강사 B씨로부터 퇴직금 청구 소송을 당했다. B씨는 계약 당시 실수령액을 높이려 ‘프리랜서(3.3% 사업소득세 원천징수) 계약’을 맺고 세제 혜택과 자율성을 누렸다가 계약이 끝나자 “사실은 학원의 지휘를 받은 근로자였다”며 사후적으로 정규직 권리를 청구했다.
#배달 라이더 C씨는 3개 배달 앱을 동시에 켜고 원하는 콜만 골라 받는 ‘멀티호밍’ N잡러로 업무 전반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C씨가 근로자성 분쟁을 제기하는 순간, 플랫폼사는 지휘·감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이른바 ‘악마의 증명’에 직면한다. 여러 앱을 쓰는 N잡러의 책임을 특정 사업주가 온전히 독박을 써야 하는 구조적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선의로 포장된 ‘근로자 추정제’(근로기준법 개정안)가 정교한 설계 없이 통과되면 일터가 계약 불신과 법적 분쟁의 난장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노동계와 국회가 올 하반기 입법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이 법안이 870만명에 달하는 프리랜서와 플랫폼 종사자의 노동 형태를 근로자 아니면 사업자라는 ‘이분법적’ 틀로 획일화하려 하고 있어서다.
배달라이더·보험설계사·학원강사·프리랜서 IT 개발자 등의 소득 구조와 업무 자율성의 크기는 천차만별이다. 이들을 근로자로 일단 추정하면, 민사 분쟁의 대원칙인 ‘주장하는 자가 입증한다’는 법리가 통째로 뒤집히게 된다. 사측이 지휘·통제를 하지 ‘않았음’을 완벽히 증명하지 못하면 모두 정규직 고용 관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규제 사정권에 포함된 플랫폼 업계는 근로자 추정제가 양날의 검이나 다름이 없다는 주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웹툰 작가의 경우 대다수가 보조작가를 고용해 연재를 한다”며 “근로자 추정제가 일률 도입되면 메인작가가 보조작가의 사용자가 되면서 비용 부담을 안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플랫폼 입장에서도 프리랜서 작가들과 고용 관계가 아닌 작품 단위로 계약을 맺고 있어 법적 분쟁 시 ‘우리 근로자가 아님’을 증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복잡한 고용 구조를 가진 카카오모빌리티 역시 직격탄을 피하기 어렵다. 카카오T 블루와 같은 가맹택시 구조에서는 중간에 법인 택시회사가 존재하지만, 배차 알고리즘을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원청 사장’으로서 공동 사용자 책임을 물 수 있다. 또 개인 사업자 지위로 멤버십에 가입해 자율 운행하던 개인택시 기사들이 플랫폼의 배차 페널티나 평점 관리 시스템을 빌미로 근로자임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사례가 나올 수 있다.
해외에서 입증된 ‘누더기 법안’의 시행착오
졸속 입법이 가져올 부작용은 이미 해외에서 시행착오로 입증됐다. 지난 2020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시행한 규제법인 ‘AB5’(Assembly Bill 5)가 대표적이다. 당초 이 법은 거대 플랫폼이 라이더 등을 프리랜서로 간주해 사회보험과 최저임금 의무를 피해 가던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목표로 출발했다. ▲업무 통제권 탈피 ▲기업의 핵심 비즈니스 외 영역의 업무 수행 ▲독립 사업자 지위 영위 등 엄격한 ‘ABC 테스트’의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프리랜서로 인정하는 근로자 추정제의 ‘시초’였다.
하지만 규제가 시작되자마자 시장은 요동쳤다. 정작 타깃이었던 우버·리프트·도어대시 등 거대 플랫폼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어 주민 투표라는 우회로를 뚫었다. 진짜 타격은 엉뚱하게도 영세 소상공인과 순수 프리랜서들에게 향했다.
규제가 프리랜서 생태계를 말살한다는 반발이 거세지자, 캘리포니아 의회는 뒤늦게 법안 전반을 수정해 음악 산업·상업 어민·수영장 청소원 등 100개가 넘는 직종에 예외 조항을 덕지덕지 붙여줬다. 대기업은 빠져나가고 영세 생태계만 규제의 덫에 갇힌 ‘누더기 법안’으로 전락한 셈이다.
2025년 국제 학술지 인포메이션 시스템즈 리서치에 게재된 미국 플로리다 대학교 워링턴 경영대학원의 치우 량페이 교수 공동 연구진의 분석은 이를 숫자로 증명한다. 연구진이 글로벌 온라인 노동 플랫폼 업워크의 프리랜서 4만1000명의 근무 기록 약 40만건을 법 시행 전후로 장기 추적 분석한 결과, 캘리포니아 AB5 도입 이후 노동자들의 전체 평균 소득은 약 8%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런데 이는 착시에 불과했다. 플랫폼 기업들이 정규직 전환에 따른 복지 및 보험료 부담을 상쇄하기 위해 단가를 낮추면서 노동자들의 평균 시급은 오히려 1.6%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이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전보다 더 오랜 시간 근무해야 했다. 치우 교수는 “노동 시장 경쟁 환경이 캘리포니아와 유사하다면 긱워커들의 시급 저하와 노동 시간 장기화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행 제도 실효성 확보 vs 정교한 하위 법령 설계
이처럼 하나의 잣대만 들이대는 규제 수단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굳이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계약 당사자 간의 실질적인 분쟁 상황에서는 현행 법제와 정부의 감독 시스템, 분쟁 조정 기관을 거쳐 충분히 다툴 수 있는 환경이 이미 마련돼 있다는 지적이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누가 봐도 근로자임이 분명한데 우열 관계를 이용해 근로기준법을 회피하려는 ‘가짜 3.3%’와 같은 사례는 정부의 감독과 단속으로 충분히 규율이 가능하다”고 짚었다.
김 변호사는 특히 “애매한 영역에 있는 종사자들은 개인 사업자 관계를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며 “계약이 끝난 뒤 발생하는 퇴직금 소송 등 개별 분쟁은 기존처럼 점차적인 법원 판결과 분쟁 기관의 조율로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며, 이를 법으로 획일화하기보다는 제도의 취지에 맞게 무분별한 확대를 제한하는 방향이 맞다”고 제언했다.
반면 입법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미국식 규제를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한국형 실정에 맞는 ‘시행령 매뉴얼’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장은 “미국 AB5처럼 법전에 예외 직종을 일일이 나열하다 보면 결국 누더기 법안이 돼 시장을 교란하게 된다”고 진단했다.
김 소장은 “우리나라는 이미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04다29736)로 확립된 ▲업무 내용 지정 ▲취업규칙 적용 ▲근무 시간·장소 지정 등 10여 개의 근로자성 판단 지표가 존재한다”며 “법안 자체는 선언적으로 통과시키더라도 입법 예고 기간 현장 실정에 맞게 시행령과 시행 규칙, 고시 지침 매뉴얼을 얼마나 디테일하고 정교하게 만드느냐가 법안의 안착을 가르는 핵심 열쇠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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