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시중은행 문 닫히자 사내대출로…‘자산 양극화’ 키우는 규제 사각지대
- [대출 절벽 현실화]②
삼성전자 최대 5억원 주택자금 지원…대출금리 연 1.5% 수준
DSR 비껴간 금융권 밖 통로…“직장 규모 격차가 부동산 양극화로 전이”
금융당국, 기업 복지 연계에 대한 제제 고민…규제하기엔 조심스러워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중소기업 직장인은 사내 대출을 꿈도 꾸지 못하는데 대기업은 수억원을 저리로 받을 수 있다니 너무 허탈하네요. 정부가 은행 대출을 막으면서 서민들만 내 집 마련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서울 구로구의 한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30대 A씨는 최근 아파트를 사려던 계획을 접었다. A씨는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도 대출 한도나 금리를 보면 엄두가 나지 않아 전세로 2년 더 버텨보기로 했다”며 “1~2%대 금리로 사내 대출을 해준다는 대기업 관련 기사를 보면 깊은 박탈감을 느낀다”고 했다.
시중은행의 전방위적인 가계대출 조이기가 시작되면서 금융권 밖의 자금 조달 통로인 ‘사내 대출’이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내 대출이란 기업이 자체 기금이나 예산으로 직원의 주거 안정을 돕거나 생활 자금을 저리에 빌려주는 복지 제도 중 하나다. 이 대출은 현재 가계대출 규제의 핵심 축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적용을 받지 않는다. 저리의 사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적은 자기 자본으로 부동산을 구매해 자산 증식을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금융 당국도 가계부채 안정화를 위해 이를 통제해야 할지 사적 복지 영역으로 두고 봐야 할지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대기업 1.5% 금리로 대출…직장 격차가 자산 양극화로 전이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노사 임금협상 합의에 따라 무주택 임직원에게 최대 5억원의 주택자금을 대출해 주는 제도를 운영할 예정이다. 대출 금리는 연 1.5% 수준이다. SK하이닉스는 현재 근속연수 6개월 이상 무주택 임직원을 대상으로 최대 1억원의 주택자금 융자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데, 삼성전자와 같은 수준의 사내 대출 제도 확대 요구가 커지는 분위기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주담대) 5년 고정형 금리가 연 4.65~7.35%인 것을 고려하면 삼성전자의 사내 대출 금리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실행된 사내 대출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가 자산 양극화를 심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금융권에서 대출 한도를 조이고 부동산 가격 상승을 억제하려 해도 직장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추가 자금을 확보하면 공적 규제가 사실상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사내 대출 제도가 없거나 재원이 부족한 중소기업 근로자·소상공인·비정규직 직장인들은 공적 규제의 직격탄을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자산 매입 경쟁에서 원천적으로 밀려나게 된다는 뜻이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직장의 규모와 복지 여하에 따라 주택 마련 가능 여부가 갈리는 현상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중은행 여신 담당 관계자는 “사내 대출을 활용할 수 있는 고소득·대기업 임직원들은 규제 국면에서도 서울 선호 지역의 부동산을 매수할 수 있지만 서민들은 진입 자체가 차단되고 있다”며 “직장 격차가 자산 양극화로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금융 당국의 규제 고민…‘국평 제한’ 기업 자구책도 실효성 의문
금융 당국이 고심하는 대목도 이 부분이다. 시중은행의 대출 규제를 풀 경우 가계부채 관리에 허점이 생기고 사내 대출을 규제하면 기업 고유의 영역을 침해한다는 반발이 예상돼서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6월 22일 서울 여의도 금감원 본원에서 열린 월례 기자간 간담회에서 “공익을 위해 사내 대출 관련 규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은 갖고 있다”면서도 “기업 복지 영역을 금융 DSR 시스템에 연계할 수 있을지 고민이 있었으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한계가 있다”고 털어놨다. 이 원장은 또 “담보를 확보할 때 저당권을 설정하면 DSR에 일정 부분 기술적으로 편입할 여지가 있을 것 같았지만 금융위원회가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며 “금감원이 나서서 주도할 수 있는 정책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우려되는 부분이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금융 당국이 직접 이를 규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금융 당국 수장이 직접적인 규제에 난색을 보이면서 자산 격차 확대를 방치한다는 비판의 화살은 고스란히 산업계로 향하는 모양새다. 이목이 집중되다 삼성전자 외에 다른 주요 대기업들도 사내 대출 제도의 혜택범위를 줄이거나 자격 요건을 까다롭게 변경하는 등 눈치 보기에 들어갔다.
삼성전자는 무주택 임직원을 위한 사내 주택자금 대출의 지원 범위를 수도권과 광역시 기준 ‘국민평형’(전용면적 85㎡ 이하) 주택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삼성 계열사 가운데 삼성디스플레이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삼성디스플레이 노조는 지난 1~3일 조합원 투표를 거쳐 수도권과 광역시에서 전용 85㎡를 초과하는 주택은 대출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최근 사내 대출을 둘러싼 여론의 비판 논란을 의식한 행보로 풀이된다. 사내 대출을 지원하는 다른 대기업 역시 임직원 대상 주거안정 기금 대출의 신청 자격을 ‘소득 기준 하위 가구’나 ‘무주택 기간 5년 이상’ 등으로 대폭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일각에서는 기업의 이 같은 자구책이 사내 대출을 통한 자산 격차 확대를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할 것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아파트 거래 물량의 대부분이 전용 85㎡ 이하이기 때문이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최근 서울에서 국민평형 신축 아파트는 20억원에 이른다”며 “비슷한 자산을 가진 직장인이라도 5억원을 더 대출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입지가 좋은 주택을 선점하게 되고, 결국 나중에 자산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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