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바이오 클러스터 ‘건설’에서 ‘생태계’로 전환할 때 [스페셜리스트뷰]
- 외형 성장 이면, 지속가능성 정책 논의 필요
선택과 집중, 권역별 밸류체인 연계 강화해야
‘백화점식 바이오단지’ 지양…지역별 차별화 필수
[황주리 한국바이오협회 대외협력본부장]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은 전국적인 클러스터 조성 열풍 속에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바이오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설정하고, 주요 거점에 대규모 건축물과 연구 시설을 구축하는 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 이면에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정책적 논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현재 가동 중인 다수의 바이오클러스터는 진정한 의미의 혁신 거점이라기보다 공급자 위주의 하드웨어 공급 모델, 이른바 ‘아파트 분양 방식’에 가까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하드웨어 중심 조성 모델의 현황과 구조적 한계
정부 주도의 방식은 부지 조성 후 취득세 감면이나 임대료 할인 등 정량적 인센티브를 통해 기업 입주를 유도하는 구조다. 이는 신도시 아파트를 건설하고 입주민을 채워 넣는 하드웨어 중심의 사고와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바이오 산업은 제조 위주의 산업군과 달리 고도의 전문 지식과 자본, 그리고 장기적 연구 결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특수성을 지닌다. 건물을 짓고 바이오 간판을 달면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는 가설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자동으로 결정한다는 치명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지자체별 예산 집행 내역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 건축비와 장비 구축 등 고정 자산 형성에 예산의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는 반면, 기업 간 네트워킹이나 글로벌 파트너십 매칭 등 소프트웨어적 지원 비중은 두 자릿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텅 빈 복도와 가동률이 낮은 최신식 장비만으로는 글로벌 자본의 유입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이는 결국 국가적 자원의 낭비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향후 클러스터의 경쟁력은 단순한 시설 제공을 넘어 인재와 기술이 충돌하며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밀도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드웨어 중심 투자가 반복되는 데에는 나름의 구조적 이유가 있다. 대규모 건축·시설 사업은 예산 집행의 규모가 크고, 완공 시점에 눈에 보이는 성과물을 남길 수 있어 중앙정부와 지자체 모두에게 ‘정치적 성과’로 포장되기 쉽다. 반면, 네트워킹 프로그램이나 글로벌 파트너십, 인력 양성 등 소프트웨어 사업은 효과가 중장기적으로 나타나고 정량 평가가 상대적으로 어려워 단기 성과를 중시하는 예산·의사결정 구조 안에서는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 이 같은 구조적 편향이 결국 ‘건물은 많은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운’ 클러스터를 양산하는 근본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대전 대덕, 대한민국판 보스턴의 원형이자 자생적 성지
▲리가켐바이오(레고켐바이오) ▲알테오젠 ▲펩트론과 같은 1세대 바이오 벤처들은 대덕의 연구 인프라와 인적 자원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특히 KT대덕2연구센터에서 출발한 펩트론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항체 기술을 바탕으로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초기 투자를 유치하며 대덕의 성공 모델을 증명했다. 이들은 단순한 입주 기업을 넘어, 성공 후에도 상당수가 지역을 떠나지 않고 후배 창업자들에게 기술 노하우와 자본을 수혈하는 '앵커 벤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덕의 자생력은 2세대 기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오름테라퓨틱은 항체-약물 접합체(ADC) 플랫폼으로 글로벌 빅파마와의 대규모 계약을 체결하며 차세대 성공 사례로 떠올랐다. 이처럼 1세대 앵커 벤처 → 2세대 후속 창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대덕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며, 기술력 하나로 승부하는 바이오 스타트업들에게 대전은 단순한 입지가 아닌 '성지'와 같은 상징성을 갖는다.
대덕에서 탄생한 바이오 벤처들의 성장 경로를 들여다보면 공통적인 패턴이 보인다. KAIST·출연연 원천기술 → 스핀오프 창업 → 정부과제·엔젤투자 → 글로벌 라이선스아웃이라는 명확한 궤적을 그리며, 같은 캠퍼스 내 선배 연구자·동료 창업자·기술이전조직과의 비공식 네트워크가 핵심 성장 동력이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자본'이야말로 대덕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형 자산이다.
동시에 대덕은 분명한 과제도 안고 있다. 임상 시험과 상업화 단계에서 필수적인 대형 병원 인프라와 글로벌 규제기관과의 접점이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해외 인재 유치를 위한 교육·문화·정주 여건 또한 충분히 갖춰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연구 단계는 대덕에서 진행하되, 임상·사업화 단계에 들어가면 서울·수도권으로 조직과 의사결정 중심이 이동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대덕의 기술 생태계와 수도권의 병원·자본·시장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잇는 ‘이중 거점’ 전략에 대한 논의가 한층 더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대덕의 사례는 클러스터의 본질이 거대한 예산 투입이 아닌 '사람과 기술의 자발적 결합'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2026년 현재, 대덕은 '바이오 벤처의 요람'을 넘어 다수의 기술이전·라이선스 아웃 사례를 통해 글로벌 수준의 기술 수출 거점으로 위상이 커지고 있으며, 이는 인위적 조성 모델이 가질 수 없는 강력한 자생력을 보여준다.
송도, 글로벌 CDMO와 '외자 소부장'의 전략적 요충지
송도는 바이오시밀러 연구개발(R&D)의 메카이기도 하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송도 5공구 통합 신사옥을 기반으로 휴미라·키트루다 등 블록버스터 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하며 12개 제품 글로벌 상용화로 시장 1위를 달성했다. 셀트리온 역시 램시마·트룩시마 시리즈로 바이오시밀러 세계 1, 2위를 석권하며 송도의 바이오시밀러 클러스터를 더욱 공고히 했다.
대학·병원 인프라도 송도의 완성도를 높인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서 운영하는 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434억 투자, GMP 실습실 완비)는 삼성바이오·롯데바이오 등 앵커 기업에 맞춤형 인재를 공급하며 산학연 협력을 주도한다. 송도세브란스병원(800병상, 2026년 개원 예정)은 바이오 임상·산업화 거점으로서 연세사이언스파크와 연계해 산·학·연·병 생태계를 완성할 전망이다.
특히 송도의 진정한 차별점은 항공 물류의 요충지라는 지리적 강점에 있다. 바이오 원부자재와 시약의 신속한 수급이 필수적인 산업 특성상, ▲싸이티바(Cytiva) ▲써모피셔(Thermo Fisher) ▲싸토리우스(Sartorius)와 같은 글로벌 장비·원부자재(소부장) 기업들이 송도를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들 외자사들은 단순한 공급처를 넘어 국내 제조 기업들과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맺으며 송도를 '바이오 생산의 메카'에 가깝게 완성시켰다. 최근 K-NIBRT와 같은 전문 인력 양성 기관까지 가세하며 송도는 제조-물류-인재가 결합된 거대한 산업 밸류체인을 안정적으로 안착시켰다.
송도의 위상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생산 클러스터와의 비교가 유효하다. 아일랜드의 코크·셔논, 싱가포르의 투아스 바이오파크 등은 이미 다국적 제약사의 대규모 생산시설과 관련 소부장 기업이 집적된 선도 사례로 꼽힌다. 이들 지역 역시 ▲항만·공항과의 근접성 ▲법인세·규제 측면의 우호적 환경 ▲숙련된 제조 인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교육 시스템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는 점에서 송도와 유사한 지점을 가진다.
송도가 글로벌 톱 클러스터로 도약하려면 단순 용량 확대를 넘어, 항공물류 강점을 활용한 '초고속 공급망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연세대·세브란스병원과 연계한 임상-생산 통합 생태계를 구축하고, 국립 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K-나이버트·K-NIBRT)를 통해 인공지능(AI) 기반 공정 최적화 전문가를 양성하며, 삼성바이오에피스·셀트리온의 바이오시밀러 노하우를 소부장 기업과 공유하는 오픈 플랫폼 전략이 핵심이다.
2030년을 가상 이정표로 놓고 보면, 송도는 이미 구축한 경쟁력 위에서 '글로벌 생산 플랫폼'으로 도약할 잠재력을 갖췄다. 앵커 기업과 소부장의 협력은 하청형 구조를 넘어선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송도의 성패는 다양한 빅파마가 전략적 생산 파트너로 선택하는 정도에 달려있다. 이를 위해 물류·인재·임상 인프라를 통합한 ▲엔드투엔드 생산 플랫폼 ▲AI 기반 스마트 공정 ▲글로벌 규제 대응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진화가 성공한다면 송도는 단순 국내 제조 허브를 넘어, 동북아 바이오 생산의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정책이 따라잡지 못한 시장의 자생력
정부가 수조 원 예산을 쏟아부어 클러스터를 만들려 했지만(오송·화순·제천 등), 진짜 클러스터는 시장 논리가 스스로 만들어냈다. 서울·경기 바이오 벨트는 정책적 유인 없이도 인재와 자본이 자석처럼 응집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반증이다.
판교는 ▲SK바이오팜 ▲차바이오텍 ▲휴온스 등 민간 앵커가 먼저 뿌리내리고 정부가 뒤늦게 따라온 전형적 사례다. 더 극적인 것은 송파구 문정동이다. 대규모 보조금이나 전담 기구 없이도 유바이오로직스를 필두로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백신 상장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강남 접근성과 인재 풀이야말로 인위적 분양 모델을 압도하는 시장 논리임을 증명한다.
수도권 벨트의 진짜 힘은 개별 클러스터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에 있다. 한 시간 내 판교 연구원-강남 임상의-여의도 벤처캐피탈(VC)-마곡 대기업을 오가는 네트워크는 보스턴-캠브리지에 버금간다. MIT-하버드-매사추세츠병원-피델리티 VC가 30분 거리인 것처럼, 수도권은 각종 종합대학·대형병원 그리고 VC하우스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이 역설의 핵심은 정책 입안자들이 여전히 '부지 조성→기업 유치'의 구시대 사고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수도권 벨트는 이미 메가 클러스터로 작동 중이다. 지방 클러스터에 퍼부은 예산을 수도권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인재 이동성 인프라'나 '크로스 클러스터 매칭 프로그램'에 재투자한다면 국가 전체 바이오 경쟁력이 훨씬 효율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지역별 중복 투자 현황과 '밀도의 경제학'
국내 바이오 클러스터는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정책적 명분 아래 전국적으로 파편화되어 조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확산은 전략적 집중이 아닌 유사 기능의 중복 투자와 자원 분산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했다. ▲오송 ▲화순 ▲제천 ▲송도 등 각 권역이 내세우는 특화 테마가 실질적 인프라 면에서 서로 겹치는 지점이 적지 않다는 점은, 국가 전체의 투자 효율성 관점에서 뼈아픈 대목이다. 이러한 중복 투자의 구조적 원인과 '밀도(Density)의 경제'가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세 가지 관점에서 진단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특화 테마의 형식적 차별화와 하드웨어의 실질적 중복성이다. 지자체들이 중앙정부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내건 ▲백신 ▲한방 ▲천연물 등의 간판은 매력적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지원 시설은 대동소이하다. 어느 지역을 가든 ▲표준화된 임대형 연구공간 ▲기초 분석 장비 ▲일반적인 비임상 지원센터가 구축되어 있다. 정작 기업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고난도의 특수 분석 장비나 숙련된 테크니션은 예산 부족과 인력 수급 문제로 공백 상태인 경우가 많다. 이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결정적인 것은 없는' 인프라의 하향 평준화를 야기하며, 글로벌 수준의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둘째, 밀도의 경제 결여로 인한 네트워크 자본의 실종이다. 바이오 혁신은 인재와 자본이 좁은 지역에 응집되어 정보와 아이디어가 '우연히, 그러나 빈번하게' 충돌할 때 발생하는 '밀도의 경제'가 핵심이다. 보스턴 켄달 스퀘어가 15분 도보 거리 내에 모든 생태계를 밀집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국내처럼 권역별로 흩어진 구조에서는 전문 인력이 수도권 이남 근무를 기피하는 ‘인적 자원 하방 한계선’ 문제가 발생한다. 인재가 모이지 않으면 자본 역시 유입되지 않고, 결국 클러스터는 공실률 상승과 운영 부실이라는 구조적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파편화된 클러스터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할 만큼의 강력한 유인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국가적 자산의 비효율적 배분으로 귀결된다.
셋째, 정량적 성과 지표에 매몰된 지자체 간 소모적 유치 경쟁이다. 현재의 클러스터 평가는 ▲입주 기업 수 ▲고용 인원 ▲건축물 완공 여부 등 눈에 보이는 정량적 지표에 치우쳐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자체들은 기업 성장을 돕는 '소프트웨어적 생태계'를 고민하기보다, 임대료 감면이나 보조금 지급 같은 단발성 인센티브로 기업을 유인하는 데 급급하다. 이는 기업들로 하여금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특정 지역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혜택이 소진되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체리 피커'(Cherry Picker)식 입주를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고 장기적 생태계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될 수 있다.
궁극적인 통합 거버넌스 구축을 위해서는 지자체 간의 소모적 유치 경쟁을 넘어, ▲과기부 ▲복지부 ▲산업부 ▲중기부 등 각 부처 간에 존재하는 고질적인 행정 칸막이부터 해소되어야 한다. 그동안 각 부처가 개별적으로 추진해온 클러스터 지원 사업들은 부처 간 성과 경쟁으로 인해 자원의 중복 투자를 심화시키고 기업들에게는 행정적 혼선만을 가중해온 측면이 있다. 최근 대통령 직속으로 설립된 ‘국가바이오위원회’는 바로 이러한 부처 간 불협화음을 조율하고,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바이오 생태계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해야 할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국가바이오위원회는 단순히 예산을 배분하는 기구를 넘어, 부처별로 파편화된 클러스터 정책을 하나의 거대한 국가 전략망으로 통합하는 실질적인 실행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자체와 부처가 각자의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메가 클러스터 안에서 각 지역이 유기적인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 위원회의 핵심 소명이다. 2026년 이후 대한민국 바이오 클러스터의 성패는 바로 이 범부처 통합 거버넌스가 얼마나 실효성 있게 작동하여, 자원을 효율적으로 집중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소프트웨어 중심의 성과 지표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성공의 척도를 '건물 면적'이 아닌 '네트워크 활성도'로 바꿔야 한다. ▲입주 기업 간 공동 연구 건수 ▲외부 VC 투자 유치 규모 ▲글로벌 라이선스 아웃 실적 등 생태계의 실질적 상호작용을 평가의 핵심으로 삼아 운영 주체의 전문성을 강제해야 한다.
또한 공공의 역할을 재정의 내려야 할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직접 운영자가 되어 시장과 경쟁하려는 태도를 탈피하고 우정바이오와 같은 민간 플랫폼이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규제를 정비하고, 인재들이 스스로 모여들 수 있는 정주 환경(교육·문화) 조성에 예산을 집중하는 '촉진자' 역할로 물러나야 ‘민간주도형’의 클러스터 생태계 구축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클러스터의 본질은 건물의 높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혁신의 농도에 있다. 바이오 클러스터란 인위적으로 '지어놓은'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기술이 스스로 '모여드는' 살아있는 생태계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바이오 클러스터가 마주한 가장 시급한 과제다.
민간 주도의 혁신적 실험-우정바이오와 광교의 시사점
정부 주도 모델이 가진 구조적 경직성을 보완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시도는 '우정바이오 신약클러스터(WIC)'와 같은 사례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곳은 민간 주도 클러스터의 실효적 모델을 지향하며, 운영 주체 스스로가 비임상 임상시험수탁기관(CRO)로서의 고도화된 기술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적인 차별화 요소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임대하는 기존 방식을 넘어, 입주 기업들에 실질적인 실험 인프라와 전문 자문을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기능적 클러스터'의 실질적 효용성을 보여준다.
민간 주도 모델은 의사결정의 신속성과 시장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력 측면에서 공공 주도 모델과 차별화된 경로를 걷는다. 우정바이오는 자체적인 투자 유치 프로그램과 기술 포럼을 상시 운영하며, 입주 기업 간의 실질적인 비즈니스 협업과 기술 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의 움직임은 공공이 제공하기 어려운 '비즈니스 밀착형 지원'이 클러스터 활성화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공공은 스스로 운영자가 되어 민간 플랫폼과 경쟁하거나 중복된 하드웨어를 구축하기보다, 민간이 가진 전문성이 시장에서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규제 환경을 정비하고 고위험 신약 개발 단계에 필요한 정책적 마중물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민간은 전문 인프라와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주도하고, 공공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적 분업'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바이오 생태계의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현재 다수의 국내 클러스터는 업종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기업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백화점식 배치’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클러스터의 진정한 경쟁력은 입주 기업의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기업의 성장을 다각도로 지원하는 파티(Party)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포진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신약 개발의 전 과정을 지원할 수 있는 ▲바이오 전문 특허법인 ▲회계법인 ▲CRO ▲VC ▲노무법인 등 밸류체인 전반을 아우르는 조력자들이 한 지붕 아래 포진해야 한다. 연구자가 실험 도중 발생한 법적 의문을 즉시 전문가와 상담하고, 투자자와 수시로 사업성을 논의하며, CRO 전문가와 임상 프로토콜을 다듬는 밀도 높은 네트워킹이야말로 클러스터가 갖춰야 할 실질적인 소프트웨어다.
글로벌 성공 모델인 보스턴의 랩센트럴(LabCentral)이 입주 포트폴리오에서 연구 기업뿐 아니라 법률·회계·투자 등 전문 서비스 파트너들의 비중을 크게 두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유기적 연결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지역 특화 전략, '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만들라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각 지자체는 백화점식 '종합 바이오 단지' 표방을 지양하고, 해당 지역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생태적 당위성을 증명해야 한다. 이는 현재 각 지역이 추진 중인 특화 사업들이 국가 전체 바이오 밸류체인 안에서 어떤 독자적인 '기능적 완결성'을 갖출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을 요구한다.
국내 유일의 백신 산업 특구인 전남 화순의 경우, 이미 구축된 시생산 시설과 연구 거점을 연계하여 '차세대 면역치료 플랫폼'으로의 고도화가 핵심이다. 국제백신기구(IVI) 등과의 협력을 단순 교류를 넘어 글로벌 진출의 실질적인 교두보로 활용하고, 고난도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화순의 인프라를 전진기지 삼아 세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능적 생태계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경북 포항 역시 지역의 강점인 '해양바이오(블루바이오)' 자원을 단순 활용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고부가가치 의약품 소재나 기능성 물질로 전환하는 '해양 자원 기반 신소재 거점'으로 특화할 필요가 있다. 지역 내 우수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해양 생물 유래 유효 성분을 정밀하게 추출하고 표준화하는 공정 기술을 지원함으로써, 포항을 글로벌 해양 바이오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성장시키는 전략이 실효성을 가질 것이다.
주요 국책기관이 집결한 충북 오송은 물리적 인프라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규제 대응 및 인허가 지원'의 자산화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규제가 기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신산업 영역에서 오송이 규제 샌드박스를 활용한 임상 설계의 표준을 선제적으로 제시한다면, 기업들은 인허가의 불확실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규제 혁신 거점'으로서 오송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충북 제천은 전통적인 약초 산업의 기반 위에서 '바이오 소재의 고도화'를 통해 합성 의약품의 한계를 보완하는 전략적 틈새를 선점해야 한다. 천연물 유래 성분의 정밀 데이터베이스화와 원료 표준화를 주도하고, 이를 스마트 공급망과 연결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바이오 소재 공급 거점'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정책 관점에서 보면, 정부가 수행해야 할 역할은 이제 한층 더 구체적인 체크리스트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첫째, 예산 구조 측면에서 하드웨어 중심 투자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인력 양성·사업화 지원·글로벌 네트워킹 등 소프트웨어 영역의 비중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중기 목표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둘째,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스스로 클러스터의 ‘운영자’가 되기보다는, 민간이 주도하는 플랫폼을 선별·지원하고 성과를 평가하는 심판이자 조정자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각 지역 클러스터에 대해서는 ‘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객관적인 지표로 검증하는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파이프라인 수 ▲임상·허가 실적 ▲글로벌 파트너십 수 ▲민간 투자 규모 등 핵심 지표를 토대로, 진정한 특화 전략을 실행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진단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한국바이오협회의 국제협력 및 홍보전략을 총괄하고 있다. 바이오플러스 인터펙스(BIOPLUS INTERPHEX), JP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J.P. Morgan Healthcare Conference) 등을 통해 주요 국제행사를 주도하며 국내 바이오 기업의 해외 홍보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또한 세계보건도시포럼 위원을 비롯해 국제바이오협회협의회(ICBA) 위원, 성남 바이오헬스산업 심의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클러스터 성과 평가 지표의 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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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과거 (하드웨어·공급 중심) 미래 (소프트웨어·생태계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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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지표 입주 기업 수, 건물 완공률 기업 간 공동연구/협업 건수
인적 자원 단순 고용 인원 (머릿수) 박사급 전문 인력 및 숙련 테크니션 밀집도
자본 유입 정부 예산 집행률, 지자체 보조금 민간 투자 유치액 (VC/엔젤투자 등)
인프라 활용 장비 도입 대수, 시설 가동률 전문 서비스 파트너(특허/법률/회계) 점유율
혁신 성과 단기적 매출액, 특허 출원 수 글로벌 라이선스 아웃(L/O) 및 상용화 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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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러스터 성과 평가 지표의 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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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역 클러스터 명칭 주도주체 핵심 앵커기업/기관 생태적 특징 및 전략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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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경기 판교 민간/지자체 SK바이오팜, 차바이오텍, HLB 벤처 메카: 자본과 인재가 선순환하는 중심지
수도권 경기 광교 민간 우정바이오, CJ블로썸파크 민간 플랫폼: 전문 CRO 기반의 원스톱 지원
충청권 대전 대덕 민간/정부 리가켐, 알테오젠, KAIST 기술 성지: 자발적 기술 창업 생태계의 원형
충청권 충북 오송 정부 대웅제약, GC녹십자, 식약처 행정/인허가: 규제 기관 기반의 생산 기지
호남권 전남 화순 지자체 녹십자, 국제백신기구(IVI) 백신 특화: 백신 밸류체인 집중 육성
강원권 춘천·홍천 지자체 휴젤, 바디텍메드 진단·에스테틱: 강소 기업 중심의 특화 발전
제주권 제주 지자체 아모레퍼시픽, 바이오랜드 소재 차별화: 천연물 및 코스메슈티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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