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덜 일하고 월급은 그대로?”…주 4.5일제에 빠진 질문
- [EDITOR’s LETTER]
주 4.5일제 첫발 뗀 은행권…근로시간 단축의 전제는 생산성 향상
획일적 시간 규제 넘어 노사 합의로 유연화…적게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해야
'저녁이 있는 삶'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등장한 정치 슬로건이다. 손학규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가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은 당시 장시간 근로에 지친 직장인들의 마음을 파고든 덕에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손 후보는 경선에서 탈락했지만 이 슬로건은 살아남아 '일과 삶의 균형 찾기'라는 시대적 요구를 상징하는 표어가 됐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의 노동운동 역사는 근로시간 단축의 역사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주 6일 근무에서 주 5일 근무로, 다시 주 52시간 상한제로, 일하는 시간은 꾸준히 줄었다.
과거 주 5일제 도입에 앞장섰던 은행권이 또 한 번 근로시간 단축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금융노사는 지난 6일 임금·단체협약을 최종 타결하고 내년 4월부터 은행 영업 시작시간을 오전 9시에서 9시30분으로 늦추기로 했다. 주 1시간 범위에서 출근 시각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도 신설했다.
금융노조가 요구해온 주 4.5일제 도입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문제는 생산성이다.
은행이 영업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배경에는 금융산업의 디지털 전환이 있다. 모바일뱅킹과 인터넷뱅킹이 보편화하면서 고객이 은행 창구를 직접 찾아야 할 필요가 과거보다 줄었다.
인공지능(AI)은 고객 상담과 여신 심사, 내부 업무처리까지 바꾸고 있다. AI가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면서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고객 불편 없이 업무량과 근로시간을 함께 줄일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과제다.
생산성 향상을 전제조건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향이다. 이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생산성은 그대로인데 '적게 일하고 더 받겠다'는 식의 접근으로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다.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생산이 감소한다면 그 부담은 결국 기업과 소비자, 나아가 경제 전체가 나눠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이창용 서울대 특임교수가 한은 연구팀과 함께 발표한 ‘근로시간 제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따르면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소득 하위 20% 근로자의 초과근로시간은 15.5%, 초과급여는 15.9% 줄었다. 총급여도 1.3% 줄었다. 근로시간 규제가 저소득 근로자에게는 소득 감소로 이어진 것이다.
생산성 향상 없는 근로시간 단축이 낳은 결과물이다.
해법은 일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업무가 없을 때는 충분히 쉬는 '근로시간 유연화'다. 주 40시간, 연장근로 12시간이라는 획일적인 주 단위 규제에서 벗어나 근로시간 총량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업무량과 근로시간을 일치시키면 불필요한 대기시간과 비효율적인 업무 관행을 줄일 수 있다. 근로시간 단축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길이다.
다만 유연화가 기업의 일방적인 근무시간 결정권 확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전제는 노사 합의와 근로자의 선택권 보장이다.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에 더해 개별 근로자의 동의와 거부권을 보장하고, 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는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배분할 권한을 주고, 근로자에게는 자신의 시간을 통제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 그것이 근로시간 유연화가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14년 전 ‘저녁이 있는 삶’은 장시간 노동에 지친 한국 사회가 품었던 절실한 소망이었다.
이제는 그 소망을 실현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적게 일하면서 더 많이 생산하고, 그 성과를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방법과 제도를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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