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3년 뒤 변압기까지 찜”…美 빅테크, 韓 전력기기 선점전
- 효성·HD현대·LS에 잇단 대형 주문
‘멀티벤더’로 생산 슬롯 미리 확보
업계에 따르면 효성중공업은 미국 빅테크 기업 2곳으로부터 3865억원 규모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용 초고압변압기를 수주했다. 각각 미국 남부와 북부에 새로 들어설 AI 데이터센터에 765㎸와 345㎸ 초고압변압기를 공급하는 계약이다.
최근 미국 빅테크가 국내 전력기기 업체를 직접 찾는 사례는 효성중공업뿐만이 아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 7월 글로벌 빅테크와 최대 1조1212억원 규모의 배전·전력기기 장기 공급 기본계약을 맺었다. 북미에 건설되는 데이터센터에 변압기와 배전기기 등을 2028년까지 순차 공급한다. LS일렉트릭도 북미 빅테크와 AI 데이터센터용 38㎸급 고압 배전시스템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당초 1064억원이던 계약은 고객사의 추가 주문으로 지난달 2309억원까지 두 배 이상 불어났다.
미국 빅테크가 한국으로 눈을 돌리는 배경에는 현지의 심각한 전력기기 공급 부족이 있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폭증하는 데다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까지 겹치면서 미국 내 생산능력만으로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워졌다.
특히 대형 변압기는 주문형 제작이어서 단기간에 생산량을 늘리기 어렵다. 국내 업체들이 초고압변압기와 배전 분야에서 오랜 수출 실적을 갖춘 데다 미국 현지 생산·서비스 거점까지 확보하면서 대안 공급처로 부상한 것이다. 효성중공업·HD현대일렉트릭·LS일렉트릭 모두 미국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빅테크의 구매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폭증하고 대형 변압기의 납기가 3~5년까지 늘어나면서, 부지 개발과 건축 일정에 앞서 전력기기 공급망과 생산 슬롯부터 확보하는 ‘파워 퍼스트(Power First)’ 전략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데이터센터를 지은 뒤 변압기를 주문하는 게 아니라 수년 뒤 생산 물량부터 미리 확보하는 ‘슬롯 선점’식이다.
대형 변압기의 납기가 수년까지 늘어나면서 건물과 서버를 모두 갖추고도 전력설비 때문에 데이터센터를 가동하지 못할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 HD현대일렉트릭의 빅테크 계약도 데이터센터 건설 일정에 맞춰 구매주문서(PO)가 순차적으로 발행되는 장기 기본계약 방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업체에 동시 주문을 넣는 것도 특징이다. 업계에서는 대형 빅테크일수록 변압기·케이블 등 핵심 전력설비를 2~3개 공급사에 나눠 확보하는 ‘멀티 벤더’ 전략을 활용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에서 특정 업체의 생산 차질이나 납기 지연으로 수조원짜리 데이터센터 전체 일정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빅테크 입장에서는 가격 몇 푼보다 정해진 시점에 전력설비를 받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한 업체에 물량을 몰았다가 생산이나 납기에 문제가 생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복수 업체와 거래하면서 몇 년 뒤 생산 슬롯까지 미리 확보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데이터센터의 경우 사업자가 부지 확보 후 한국전력과 전력 공급 용량을 협의하고, 인허가와 설계를 거쳐 변전설비나 냉각설비 등 주요 장비를 발주하는 순서로 사업이 진행된다. 미국 빅테크처럼 수년 뒤 변압기 생산 슬롯부터 선점하는 방식은 아닌 셈이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국내에서도 미국의 방식이 등장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수도권에 데이터센터가 몰리면서 한전으로부터 필요한 전력을 언제 공급받을 수 있느냐가 착공과 준공 일정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면서도 “국내에서도 AI 데이터센터가 대형화할수록 전력 확보와 장납기 전력설비를 사업 초기부터 동시에 챙기는 방식이 중요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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